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닌 투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해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등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모여 오늘을 이뤘다. 교내 구석구석에는 이러한 투쟁과 고뇌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관악 캠퍼스 규장각 인근의 ‘4월 학생혁명 기념탑’에서 사회대, 인문대, 중앙도서관, 자연대, 농생대까지 1.2㎞에 걸쳐 이어지는 ‘민주화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화의 길 조성위원회’가 추진한 ‘민주화의 길’은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이 달 초 완공됐다. 공동위원장을 맡은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이번 사업에 대해 “6월 민주항쟁을 비롯해 4·19 혁명 등 한국 민주주의의 혼란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서울대 열사 19명의 추모기념물을 정비했다”고 밝혔다.

사진: 이다은 기자 daeunlee@snu.kr
그래픽: 김지우 기자 nabarium@snu.kr

 ‘민주화의 길’ 그 첫걸음은 규장각에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4·19 위령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1960년대 서울대가 아직 동숭동에 있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4·19 혁명이 일어난 당시 희생된 고순자, 김치호, 안승준, 유재식, 박동훈, 송준근 6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함이다. 동숭동에서 출발한 학생들이 광화문을 지나 경무대를 향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경찰의 조준발포로 여섯 열사를 비롯한 200여명의 시민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규장각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본부 뒤 아크로광장을 지나 농생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 겨본다. 농생대 옆에는 김상진 열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마련돼 있다. 1975년 긴급조치를 통해 수립된 유신군사정권은 당시 민주화를 갈망했던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이었다. 유신정권의 부당함에 분노한 학생들은 자유성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유신헌법의 문제성을 고발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읽던 김 열사는 갑자기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라고 외치더니 품 안에서 과도를 꺼내 할복했고 이튿날 의대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정권은 장례식도 금지한 채 김 열사의 시신을 화장했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5월 22일 아크로에서 별도로 장례식을 치른 뒤 시위를 벌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유신체제가 붕괴하지만 민주정부 수립은 여전히 머나먼 꿈이었다. 이듬해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서울의 봄’이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망은 신군부에도 굴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시위와 투쟁의 시기였다. 농생대에서 중앙도서관을 지나 인문대로 오는 길에서 접할 수 있는 황정하 열사의 추모비와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추모비가 그 시대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서울의 봄’이 비상계엄령으로 종식되고 정권이 미국에 예속되면서 ‘민주주의’와 ‘자율국가’를 얻기 위한 투쟁이 고조됐다. 서울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1년 교내 시위 중 중앙도서관 6층에서 황정하 열사가 투신했고 1986년에는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분신이 그 뒤를 이었다. 김세진·이재호 열사는 “미국에 예속된 정권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 실시하는 미국 용병교육인 전방입소 훈련을 거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위를 하다 잡히면 학사제명에 징역 3년이 최소한이던 시절, 개인적인 이유로 전면에 나서 활동하지 못한 이들은 대학을 다닌다는 것만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추모비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는 박혜정 열사도 그중 한명이었다. 1986년 5월 22일 한강변에서 주인 없는 가방이 발견됐다. 가방에는 원고지 3장 분량 정도의 편지가 있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음이다. 부당하게 빼앗김을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은 죄. 부끄럽게 죽을 것. 자살로 도피해버린다고 욕하라. 욕하고 잊어 달라…’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고민하던 박혜정 열사는 결국 자살을 택했다. ‘욕하고 잊어달라’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부시정부가 석유, 군수산업을 위해 벌인 지난 이라크 전쟁에서 꼼짝없이 ‘자발적’ 파병을 수용해야만 했던 한국의 입장,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대학생으로서의 양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교내에 최루탄 안개가 자욱하고 경찰이 학생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던 병영정부시대로부터 민주주의 시대로의 전환점은 ‘6월 민주항쟁’이었다. 박정혜 열사의 추모비에서 사범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박종철 열사의 추모비에는 그 역사가 어려 있다. 1987년 박종철 열사는 공안당국에 붙잡혀가 동료의 소재를 밝히라는 이유로 물고문을 당하다 결국 사망했다. 당시 조사결과를 발표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익사가 명백하다는 전문의의 진술에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둘러댔고 이에 분노한 시민이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면서 6월 항쟁이 시작됐다. 이미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을 경험한 바 있는 전두환 정권은 또다시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누르기 어려웠고 마침내 직선제 민주헌법 요구를 수용했다.

집회 강제진압, 미디어법 강행 등 현 정권이 보여주는 모습에 ‘민주주의의 퇴보’라는 우려가 크다. 문득 1986년 학관 4층에서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투신한 이동수 열사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민중은 말이 없지만, 또 우둔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역사만이 나의 몸부림을 심판해줄 것이다.” 이 시대, 우린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그들의 추모비가 유달리 커 보이는 늦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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