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철학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683쪽 / 2만5천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복음 첫 구절에 등장하는 ‘말씀’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창조자의 의지에 따라 세상의 질서를 구현하는 이치다. 그러나 이 말을 세상의 근본에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 보면 어떨까. 지난달 26일 출간된 김용석 교수(영산대 철학정치학경제학 연계전공)의 『서사철학』은 정말 그렇다고 말한다.

김용석 교수는 문화철학 분야에서 ‘개념의 예술가’로 불리며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왔다. 전작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서 철학과 문화를 접목하는 이론을 다듬어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문화 중에서도 ‘서사’에 집중한다. 저자는 ‘설’을 풀어내는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설리(說理)’를 세상 이치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는다.

‘서사철학’은 김 교수가 학계에 새롭게 제안한 개념으로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관심과 연구를 통칭한다.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물리학, 인간 사이의 행위와 관계를 탐구하는 윤리학,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논리학과 같은 기존 학문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탐구하는 것에 그칠 때 서사철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도 눈을 돌린다. 하지만 서사철학은 단순히 이야기를 잘 ‘만들기 위한’ 방법론이 아니다. 서사철학의 진가는 인간의 창조물인 ‘이야기’에 대한 연구가 곧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는 데서 드러난다.

저자가 펼친 스펙트럼을 따라 신화·대화·동화·혼화·만화·영화 등 다양한 서사 콘텐츠를 넘나들다 보면 ‘진화’ 앞에서 멈칫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머지의 ‘화(話)’와 구분되는 ‘화(化)’를 쓰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의 통찰이 빛난다. 서사철학은 기존에 이야기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던 서술, 설명, 해석의 방식들에까지 이야기의 성격이 잠재함을 발견한다. 사회과학적 설명이나 자연과학적 기술에서도 ‘이야기로 풀어내려는’  인간의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화는 항상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탓에 생명 세계의 점진적 변화를 순차적으로 풀어내고 이를 통해 미래의 패러다임까지 제시하는 진화론은 이야기와 친화성을 갖게 된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다윈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셈이다.

발행을 담당한 휴머니스트 선완규 주간은 “새로운 개념뿐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며 책의 출간 의의를 설명했다. 서사철학 개념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텍스트에 대한 접근방식에서도 책은 여러모로 선구적 역할을 한다. 선 주간은 “이 책은 같은 주제를 다루는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보다 깊고,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보다 구체화·체계화됐다”고 덧붙였다. ‘아이리스(Iri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무지개의 여신으로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자다. 『서사철학』은 서사와 철학을 연결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내고 거기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도출해낸 ‘스토리텔링’ 시대의 아이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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