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뇌 이야기
‘말랑말랑’한 뇌 이야기
  • 이대한 기자
  • 승인 2009.11.1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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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기획] 시냅스와 기억

약 1.5kg 남짓한 작고 말랑말랑한 인간의 뇌는 거대한 세계의 많은 비밀을 풀어왔다. 특히 과학이라는 발명품을 개발한 이후 뇌가 세계의 암호를 해독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해가 뜨고 지는 비밀을 풀어냈고,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비밀도 풀어냈다. 거침없는 뇌의 행보는 세게 전체를 이해해버릴 기세다. 그러나 뇌 앞에는 분명히 거대한 장벽이 놓여있다. 그 난관은 바로 ‘자신에 대한 이해’다. 뇌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해탈의 길에 버금갈만한 과업은 우주 탄생의 비밀 정도뿐이다. 『대학신문』에서는 우리 뇌가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살펴보고 블랙박스로 여겨졌던 뇌의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블랙박스 안에 든 ‘말랑말랑’한 뇌를 꺼내다

예술성, 사회성, 종교성은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 꼽힌다. 인간을 다른 종(種)과 구분하는 이런 특성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뇌에서 벌어지는 고등한 신경 활동의 결과다. 정치나 예술 같은 고도의 지적 활동을 위해서는 플라나리아나 오징어의 단순한 반사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신경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등 신경 활동의 중추인 뇌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중반까지 심리학적 접근법이 주류를 이뤘다. 스키너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블랙박스’로 취급했다. 자극이 들어가면 알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반응이 나오는 요술 상자로 여긴 것이다. 이렇게 자극과 반응이라는 간단한 도식에 따른 접근은 기본적으로 오징어의 뇌를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심리학적 접근으로는 신경 활동의 구체적 기작을 밝히고 이를 임상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실 인간의 뇌는 딱딱한 블랙박스나 오징어의 뇌가 아니라 뉴런이라는 신경세포 1천억 개로 이뤄진 말랑말랑한 덩어리다. 진정으로 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블랙박스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말랑말랑한 뇌를 꺼내야 했다.

블랙박스를 여는 시도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학습과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강봉균 교수(생명과학부)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라며 “학습과 기억 연구는 치매나 학습장애 치료를 위한 의학적 측면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고 설명했다. 기억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연구자들은 기억이 형성된다고 알려진 포유동물 뇌의 해마(Hippocamupus)에 주목했다. 뇌의 여러 부분 중 해마가 기억을 담당하므로 해마 뉴런은 다른 뉴런과 다를 것이라는 가설이 세워졌다. 그러나 연구 결과 해마 뉴런 그 자체는 다른 뉴런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말랑말랑한 시냅스에 기억이 저장될까?

해마 뉴런에서 다른 뉴런과의 별다른 차이가 관찰되지 않자 연구자들은 뉴런 자체보다 이들이 이루는 네트워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들은 복잡한 네트워크에 바로 접근하기 어려워 우선 두 뉴런 사이의 접속 부분인 시냅스(Synapse)에 주목했다. 이들은 1949년 캐나다의 심리학자 헤브가 뉴런이 함께 흥분하면 두 뉴런이 연결된다며 제안한 ‘Fire together, Wire together’라는 헤브의 규칙을 재해석했다. 서로 지속적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뉴런의 시냅스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시냅스의 강도가 고정된 것이 아닌 가변적이라는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을 함축한다.

시냅스를 사이에 둔 두 뉴런 간의 신호전달은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이뤄진다. 시냅스 전 뉴런의 전기 신호가 시냅스 부근까지 전달되면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고, 이것이 시냅스 후 뉴런의 수용체에 결합하면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시냅스 가소성은 이 과정의 효율성이 항상 고정돼 있지 않고 외부 자극이나 현재 및 과거의 활성도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냅스가 ‘딱딱’한 것이 아니라 ‘말랑말랑’하다는 것이다.

신경생물학자들은 기억의 형성이 바로 이 말랑말랑한 시냅스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자극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면 시냅스가 이를 실제로 기억하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직접적 증거는 토끼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 1973년 팀 블리스 박사와 로모 박사가 토끼의 해마에서 빠른 주파수로 한 뉴런을 자극한 후에 그 뉴런을 자극하면 그 순간뿐 아니라 상당기간 동안 시냅스에서의 신호 전달 효율이 증가함을 밝힌 것이다. 이 현상은 일시적 효율증가인 단기강화와 구별해 장기강화(LTP, Long-term Potentiation)로 명명됐다. 바다 달팽이인 군소(Aplysia)에서 장기촉진이라는 비슷한 현상이 에릭 칸델 박사에 의해 보고됐다. 칸델 박사는 그 공로로 2000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어 마크 베어 박사가 반대로 시냅스 효율이 감소하는 장기저하(LTD, Long-term Depression)를 발견했다.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1천억 개의 뉴런은 각각 1천 개에서 최대 10만 개의 뉴런과 접속한다. 따라서 우리 뇌에는 천문학적인 시냅스가 존재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연구로 시냅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밝혀지면서 학습과 기억을 비롯한 뇌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시냅스와 기억 사이의 비밀을 풀 열쇠, LTP와 LTD

이후 30여년간 연구자들은 LTP나 LTD가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시냅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 이 비밀을 밝힌다면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분자적 이해가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연구는 포유류 해마의 일부인 CA1이라는 부분을 대상으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다. CA1 연구에서 밝혀진 LTP/LTD의 개괄적 기작은 다음과 같다. 시냅스 전 뉴런에서 분비된 글루탐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은 시냅스 틈에서 확산돼 시냅스 후 뉴런의 수용체에 결합한다. 글루탐산이 수용체에 결합하면 수용체의 통로(Channel)가 열려 그 안으로 전하를 띤 이온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이런 글루탐산 수용체에는 크게 NMDA 수용체와 AMPA 수용체가 있다. 이 중에서도 NMDA 수용체가 특히 LTP/LTD와 밀접히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통로가 쉽게 열리는 AMPA 수용체와 달리 NMDA 수용체는 통로가 마그네슘 이온에 막혀 있어 잘 열리지 않는다. 시냅스 전 뉴런으로부터 많은 자극이 주어져야만 비로소 마그네슘 이온이 빠져나와 통로가 열린다. 그러나 일단 통로가 열리고 나면 괄목할만한 변화가 시작된다. AMPA 수용체는 통과 못 하는 칼슘 이온이 NMDA 수용체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뉴런 안으로 들어온 칼슘 이온은 신호 전달 물질로 작동하며 세포 안에서 여러 가지 반응을 촉진한다.

이때 뉴런 내에서 칼슘이 증가하는 속도에 따라 시냅스에서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진다. 칼슘이 급격하게 증가하면 LTP가 진행된다. AMPA 수용체의 이온 통과 효율이 높아지고 심지어 더 많은 AMPA 수용체가 시냅스 후 뉴런의 세포막에 삽입된다. 그 결과 시냅스 후 뉴런은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반면 같은 칼슘이라 해도 서서히 증가하는 경우 LTD가 진행된다. AMPA 수용체의 숫자를 줄이는 등의 과정을 거쳐 시냅스의 효율이 감소한다.

시냅스 가소성 기작 조절의 유용한 적용 시도

기초적 기작이 밝혀지자 1990년대 후반부터 시냅스 가소성과 기억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들이 잇따라 보고됐다. 1996년 챈(Tsien) 박사팀은 NMDA 수용체에 이상이 있는 쥐에서 LTP 뿐만 아니라 공간 기억에 이상이 생김을 확인했다. 심지어 탕(Tang) 박사팀이 1999년 NMDA 수용체를 더 많이 발현시키자 기억력이 좋아졌다. 2000년 들어서도 LTP와 장기기억 사이의 관계를 입증하는 사례들이 계속해서 보고됐다.

시냅스 가소성에 대한 분자적 이해는 ‘기억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임상적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대표적 사례로는 공포기억 소거를 들 수 있다. 우리 뇌 속에는 공포반응을 주관하는 편도체라는 부위가 있다. 공포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편도체에서 NMDA 수용체에 의존적인 LTP가 진행된다. 실제로 NMDA 수용체 작용제인 D-cycloserine이라는 약물을 처리하면 공포기억 소거가 더 잘 일어나는 것이 확인됐다. 최석우 교수(생명과학부)는 “고소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TSD) 등 공포기억과 관련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 D-cycloserine이 노출치료 후 재발가능성을 낮추는 약물로 이용 중”이라고 말했다. 시냅스 가소성에 대한 분자적 이해가 실제로 기억 관련 질환을 치료하는 데 응용되는 것이다. 현재 LTP/LTD 조절의 임상적 응용은 약물중독 치료와 파킨슨병 치료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신경생물학자들의 집념과 열정으로 블랙박스에 들어 있던 말랑말랑한 뇌를 꺼내면서 뇌 연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에는 설명할 수 없던 복잡한 현상을 시냅스 가소성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설명할 수 있게 됐고, 이를 지지하는 풍부한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강봉균 교수는 “단순히 시냅스 가소성 변화를 측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시냅스 가소성 자체의 특징이나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최근 동향을 설명했다. 같은 정도의 자극에도 시냅스 가소성 변화의 방향이나 강도가 신경세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초가소성(metaplasticity) 현상에 대한 연구도 막 시작되고 있다. NMDA 수용체에 의존적인 LTP/LTD 외에도 다른 형태의 LTP/LTD가 보고되고 있는데 시냅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LTP/LTD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뉴런과 뉴런 사이의 LTP/LTD와 같은 단순한 현상이 신경 네트워크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 복잡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밝히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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