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문학, 장르를 논하다
장르문학, 장르를 논하다
  • 이대한 기자
  • 승인 2009.11.14 2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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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00년대 문학계를 결산하다

PC 통신에서 웹진, 포털 사이트 등으로 활동 무대 옮긴 장르문학
출판 시장에서 활약한 작품 대다수 외국 번역서나 드라마 원작 소설

지난 10년간 문학계는 갖은 위기설에 시달렸다. 소설의 위기가 논해졌고 문학 자체가 끝장나고 있다는 근대문학 종언론도 등장했다. 그러나 문학계 전체가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추리, 판타지, SF, 로맨스, 무협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장르문학은 양적 성장뿐 아니라 자신의 외연을 넓히며 주류 문단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장르 고유의 규칙과 관습을 따르는 문학’으로 정의되는 장르문학의 지난 10년간 행보와 그 거침없는 행보가 야기한 논의를 짚어본다.

◇출판시장에서 활약 중인 장르문학

출판시장에서 장르문학의 약진은 단연 돋보인다. 교보문고에서는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장르소설의 평균 판매신장률이 25%로 14%인 일반소설 신장률을 웃돌았다. 전체 소설 분야 내 장르소설이 차지하는 비중도 갈수록 높아졌다. 2005년 1/4분기에는 18.8%였던 장르문학의 점유율은 올해 1/4분기에는 26.2%로 껑충 올랐다.

1990년대 PC 통신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장르문학가들은 2000년대 들어 웹진이라는 새로운 인터넷 매체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작가들은 대부분 웹진 ‘거울’(환상문학), ‘크로스로드’(SF·판타지), ‘한국미스터리창작모임’(추리), ‘매드클럽’(공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이들의 창작물은 단행본 형태로도 출간돼 오프라인 출판 시장에도 장르소설이 공급되며, 웹진 ‘거울’과 ‘FANGAL’(판타지)은 중단편 장르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시리우스 문학상’을 제정했다. 온라인 잡지의 활약에 힘입어 2007년에는 오프라인에서 장르문학 전문 계간지인 『판타스틱』이 창간되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도 장르문학의 성장세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포털 사이트 다음은 ‘장르스페셜’ 코너를 신설해 장르문학 작품들을 독점 연재 중이다. 네이버도 ‘오늘의 문학’을 통해 매주 1회 단편 장르소설 전문을 게재한다. 출판업계에서도 대형종합출판사들이 장르문학 전문 자회사를 잇달아 설립하며 적극적으로 시장개척에 나섰다. 김영사는 2005년 ‘비채’를 설립했고 웅진도 2006년 ‘노블마인’을 설립해 올해부터는 국내 작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여전히 부실한 내적 기반, 돋보인 외연 확대

장르문학의 약진이라고 불릴만한 지난 10년간의 성장세를 장르문학계 내부에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우선 과도한 외서 의존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황금가지 김준혁 편집장은 “장르문학 중 유명한 작품은 대부분 외국소설을 번역한 것”이라며 “한국 장르문학 중에는 문학적으로 탄탄한 작품이 없고 사회적 이슈가 된 작품도 거의 없다”라고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시장에서 장르문학이 선전한 것은 외부적 요인에 힘입은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판타스틱』의 조민준 편집장은 “장르문학 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내적 성장보다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콘텐츠와의 결합에서 효과를 본 측면이 크다”고 설명했다. 일정 수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안정적인 작가군의 부재라는 고질적 문제도 제기된다. 출판사 비채가 뉴웨이브 문학상을 제정한 것도 과도한 외서 의존을 줄이고 국내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도 장르문학의 약진이 논의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장르문학의 외연이 본격문학까지 확대됐기 때문이다. 조민준 편집장은 “장르문학 자체가 특별히 약진했다기보다 주류시장에서 일반문학의 장르성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문학계간지에 장르적인 소설이 게재되기 시작했고 신춘문예나 문학상 당선작에 장르물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는 조현의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SF)이,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으로 박민규의 「龍龍龍龍」(무협)과 윤이형의 「완전한 항해」(SF)가 당선됐다.

◇장르문학, 장르의 벽까지 허물까

지난 10년간 장르문학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논의가 뜨겁게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이 서로 대립하는 논쟁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본격문학의 문학적 우월성을 옹호하는 평론가는 장르적 요소를 차용한 ‘장르적 소설’과 장르소설을 구분하고자 했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오현종의 「창백한 푸른 점」에 대한 비평에서 “가상의 세계나 과학적 이론으로 제시된 개념 공간을 유영하는 쾌감이 아닌 현재의 삶을 다른 시선으로 객관화하므로 SF와 구별된다”는 주장을 폈다. 한편 이런 주장에 대해 문학평론가 박진씨는 “지금-여기의 삶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SF 장르의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반박하며 본격문학계의 방어적 주장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주류문단에서 장르문학의 약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장르문학계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외연 확대를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SF 작가 듀나는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에서 “과학과 과학적 상상력이 현대사회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SF 소설이 좀 더 보편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소설 전문무크지인 『Happy SF』는 창간호에서 ‘SF는 주류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좌담을 열기도 했다. 이 좌담에서는 본격문학 위기의 근원이 무엇이고 이를 SF나 판타지가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다.

최근에는 장르문학 대 본격문학이라는 논쟁 구도 자체를 문제 삼는 방향으로 논의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창작과비평』 2008년 여름호에서 박진씨는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영역을 공간적으로 구획할 수 없다”며 “장르문학은 본질적으로 본격문학이 아니라는 등의 전제가 의심스럽고 자의적”이라고 비판했다. 본격문학도 나름의 서사적 관습이 있다는 주장은 이런 비판을 뒷받침한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한국 순수문학의 주인공은 관습적으로 음울하다”며 본격문학에서도 일종의 장르적 규칙이 존재한다고 지적했고, 문학평론가 조영일씨는 본격문학을 창작하는 ‘노하우’를 배우는 문학창작과 출신 작가가 득세하는 문단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제 장르문학에 대한 논의는 장르문학 대 본격문학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장르 서사가 문학적 상상력과 사유의 장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장르문학 내부에서도 장르적 관습을 해체하거나 다른 장르와의 교배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장르문학은 ‘내실 다지기’를 이루고 한발 더 나아가 한국 문학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영도 작가의 한 마디가 여운을 남긴다. “좋은 장르와 나쁜 장르는 없다.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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