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CBS 정혜윤 PD

대학시절 그가 조우한 성전
크레타 섬에서 만난 실존인물 조르바
온몸으로 껴안는 생(生)의 생동감을 느끼게 해

그래픽: 유다예 기자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484쪽 / 1만8백원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다. 나는 대학 1학년 때 처음 조르바를 알게 됐는데 그때의 기분은 즐거운 충격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못 찾겠다. 나는 그 뒤로도 조르바를 사랑하고 숭배하기를 멈추지 못했던 것 같은데, 조르바를 숭배한다는 것은 내겐 권태 따위는 발로 차버린다는 뜻과도 같고 세상 만물을 마치 처음 보듯 깜짝 놀라 본다는 것과도 같고 허위의식은 콧방귀와 함께 날려 본질로 날아가 버리되 그렇게 내려앉은 땅에서 취할 것은 오로지 이 지구의 가장 소박한 기쁨이기만 바란다는 뜻과도 같다. 나는 일전에 어느 칼럼에 조르바 이야기를 쓰면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 권의 책이 그야말로 생동하는 어록이다. 직업인들이 일하기 전에 외워야 할 기도문이고 허영, 젊음, 영원, 죽음 같은 추상적 언어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정신 대신 육체를 사랑하기 위해 읽어야 할 땀 냄새 밴 책이며 쭈빗쭈빗 망설이기만 하는 행동의 발기불능에 걸린 사람이 읽어야 할 처방전”이라고 썼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나날이 강렬해진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크레타로 가는 배 안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난 실존 인물을 모델로 쓴 소설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내 영혼의 자서전』에서 조르바를 이렇게 말한다. 조르바란 인물에 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경탄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대로 옮겨본다.

CBS 정혜윤 PD
저서로 『침대와 책』『런던을 속삭여줄게』 등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구루라고 일컫고 아토스산의 수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글 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그가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마치 만물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 따위의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게끔 해주며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정하는 대담성과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때려 부수려고 조르바의 나이 먹은 마음에서 회생의 힘을 분출해야 하던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뱃속보다도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었다…그가 나에게 한 말과 나를 위해 그가 추었던 춤과 갈탄을 찾는답시고 수많은 노동자와 크레타 해안에서 여섯 달 동안 땅을 파며 지내던 무렵 그가 나를 위해 연주한 산투르를 회상하면서 내가 어찌 가슴 벅찬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 다 현실적인 목표란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먼지일 따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어서 해가 지고 일꾼들이 일을 끝마쳐서 우리 두 사람이 바닷가에 저녁상을 차려 놓고 맛좋은 시골 음식을 먹고, 시큼한 크레타 포도주를 마시며 얘기를 할 시간만 기다렸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전 페이지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제일 좋아한다.

“크레타 섬의 큰 마을에 사시던 나의 외조부에겐 매일 저녁 등불을 들고 거리를 다니면서 혹 갓 도착한 나그네가 없나 찾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있으면 집으로 데려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는 안락의자에 앉아 길쭉한 터키식 장죽에 불을 붙이고는 나그네에게 지엄한 분부를 내렸다.

-말하소!
-무슨 말을 하라는 겁니까요?
-자네 직업이 무엇이며,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자네가 본 도시와 마을이 무엇 무엇인지 깡그리.

이렇게 되면 나그네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주섬주섬 주워섬겼고 우리 외조부는 안락의자에 앉아 귀를 기울이며 이 나그네를 따라 여행길을 나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마을을 떠나신 적이 없었다. 크레타 해안에서 나도 외조부의 그런 기벽을 완성하고 있다. 나 역시 등불을 들고나가 나그네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이야기하세요, 조르바.

조르바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산이, 숲이, 냇물이, 게릴라가, 부지런한 여자들과 건강한 사내들이, 스물한 개의 수도원과 아토스 산이, 무기창고가, 엉덩이가 펑퍼짐한 그 지방 게으름뱅이도 나타난다.”

조르바의 끝없는 이야기를 듣는 건 세상이 이야기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이 지어진 그 방식으로 나도, 오렌지 나무도, 과부댁도, 창녀도, 앵무새도, 돌도, 나무도 지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과도 같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일 뿐이고 (앞날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나도 그 이야기의 단지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내 삶도 우려와 한숨이 아닌 기대 섞인 담담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조르바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이 순간 자네 뭐하나?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시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란 이 말이 얼마나 강한 말인가를 살면서 종종 깨닫는다. 사는 동안 우리에게 설탕 같은 위로와 환상과 어느 정도의 행복감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 사람 모두는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걷고 있고 걸어가야 한다는 인식인 것 같다. 자기 길을 잘 걸어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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