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억제하지 않는 시대
사회의 천박함이 만연해지고
솔직함은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루저 논란’의 본질도 여기에 있어

대부분의 종교는 하나같이 욕망을 억제하는 법을 가르치고 대부분의 신화는 욕망이 불러오는 파국을 말한다. 불교, 기독교, 유교 전통이 그러하고 물욕에 대한 경계를 나타내는 ‘미다스의 손’으로 시작되는 신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욕망은 과거부터 계속 존재했지만 사람들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이를 가르쳐왔다.

그런데 확실히 시대가 변했는지 어느덧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욕망을 감추는 시대에서 욕망을 드러내는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이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죄스러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유행하던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이라는 신조어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전형적인 클리셰다. “솔까말, 돈만 많으면 땡이지”, “솔까말, 몸매만 좋으면 된 것 아냐?” 등의 형식으로 쓰이는 이 신조어 뒤에는 대부분 물질에 대한, 성에 대한, 학벌에 대한 욕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거짓이 만연한 사회에서 ‘솔직함’으로 포장돼 죄의식을 감춘다.

하지만 문제는 욕망을 드러내는 이 솔직함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다수의 욕망이 만드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히 소외된다.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물질에 대한 욕망은 노동자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진다. 출신 학교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사회에서 학벌에 대한 욕망은 수험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성적인 욕망도 더는 은폐의 대상이 아니게 되면서 그 욕망이 만든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한때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신조어 ‘꿀벅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키백과는 꿀벅지를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핥고 싶은 허벅지’라고 정의하는데, 성에 대한 욕망이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도 온갖 언론에서 이를 사용하고 떠들어댔던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결국 한 여고생은 여성부에 ‘꿀벅지’라는 단어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며 청원을 냈지만 돌아온 것은 “성희롱 민원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언론에서 사용하는 단어 관련 문제는 방송통신위원회에 제기해야 할 문제”라는 답변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부 언론에서는 여전히 ‘꿀벅지’라는 신조어를 남발한다.

이처럼 숨기지 않고 욕망을 드러내면서 사회는 점점 천박해진다. 그리고 그 천박함 속에서 욕망의 드러남은 도덕적 판단 기준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잣대마저도 뒤흔든다.

연일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루저(loser)’ 사건도 마찬가지다. KBS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키가 180cm를 넘지 않는 남자는 모두 ‘루저’”라고 말한 어떤 여대생의 발언은 역시나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문제의 여대생은 대본을 따랐을 뿐이라는 사과문을 올렸지만 제작진은 대본을 강요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대본이 강요됐든 강요되지 않았든 이 솔직함이 ‘키가 180cm가 넘지 못하는 남자’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됐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루저’ 논란의 본질은 대본이 아니라 그 기저에 깔린 ‘욕망’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많은 여성이 키 큰 남자를 선호한다”며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여대생을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명에도 결국 키가 180cm가 되지 않는 한 ‘루저’인 남성은 KBS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로써 단순히 욕망을 품는 것과 그를 실제로 말로 내뱉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증명된 셈이다.

이 모든 게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왜소증 장애로 작은 키가 괴로웠던 한 남성은 인터넷에 “대놓고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려 비참하다”는 심경을 밝혔다. 이처럼 불행하게도 욕망은 드러나면서 폭력을 동반한다. 그래서 이제는, 욕망에 대한 솔직함이 무섭다. 언제 어디서, 나도 모르게 내 욕망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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