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얽매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국제협력NGO에 해외봉사활동을 신청했다. 오랜 고민 끝에 철저하게 타인을 위해 살아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나긴 선발과정과 교육과정을 거쳐 필자는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베이징 변두리의 한 자폐아동교육학교에 파견됐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세 이하의 가벼운 자폐증세 아이들을 교육시켜 증상을 완화시키는 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던 파견기관의 정보는 엉터리였다. 자폐아동학교에는 ‘아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이들뿐이었다. 남학생들은 키가 180cm가 넘었고, 유일한 여자아이는 머리를 바짝 깎아놓은 데다 검게 탄 얼굴에 인상까지 잔뜩 찌푸리고 있어 마치 군인 같았다. 겉보기에 20대 중반처럼 보이는 이 아이들이 실제로는 15세에서 18세였다.

자폐증 증상도 심했다. 간단한 인사말을 가르치는 일조차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소변을 가리는 기본적인 교육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다. 또 주위의 관리가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돌발행동을 일삼았다. 자기 머리를 벽에 찧거나 창문을 주먹으로 깨뜨리려 하고, 이를 막으려고 하면 내게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참을 만했다.  하지만 수십 번씩 반복해서 가르친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의 허탈감은 정말 괴로웠다. 교육의 효과를 전혀 알 수 없이 반복되는 내 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아, ‘내가 과연 전 재산을 털어 쳇바퀴나 굴리려고 중국까지 온 것인가’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렇게 5개월이 넘어갈 즈음 한 아이의 부모님이 들뜬 얼굴로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 얼마 전부터 집에서 한국 노래를 부른다고 말해줬다. 아이들에게 틈날 때마다 ‘곰 세 마리’ 동요를 불러주며 율동을 가르쳤는데 내 앞에서는 그렇게 하기 싫어하더니 집에서는 잘 하더란다. 그리고 바지에 용변을 보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이 말에 그동안의 눈물과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쳇바퀴 같기만 했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베이징을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아이들에게 곧 헤어져야 한다며 “잘 가, 건강해”라는 작별인사를 반복해서 가르쳤다. 그 때 유난히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나를 힘들게 했던 ‘펑화이’라는 아이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아이의 눈물을 보니 아이의 증상이 조금이나마 개선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현지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가족들이 나를 한국의 ‘열심장(熱心腸,뜨거운 심장을 가진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해주며 전송했다. 그러나 내 심장은 이제 겨우 미미한 온기를 띠기 시작했을 뿐이다. 앞으로 온기를 띠기 시작한 내 심장을 점점 더 뜨겁게 달구고 싶다.
 
최환기
중어중문학과·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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