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소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시대다. 가족이 둘러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의 식탁 밑이나, 혹은 강의실 책상 밑에서 부지런히 오고가는 문자는 어떤가? ‘언제 어디서나’ 목소리의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핸드폰은? 하루만 열지 않아도 2~3페이지를 넘기는 메일 박스는? 흥미로운 인터넷 사건 기사 밑으로 줄줄이 달리는 수백 개의 댓글은?
기술의 발전은 소통에 제한을 가하던 거의 모든 물리적인 조건, 가령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줬다. ‘존재하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라는 반세기전 러시아 철학자 바흐친의 말이 축자적으로 실현되는 시간이 도래한 듯하다. 국민과 소통이 부족하다던 대통령은 드디어 직접 라디오 마이크를 들었다.
소통의 가능성의 확대와 함께 정작 소통에 대한 욕구가 커진 것은 실은 소통의 가능성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실현되는 일은 쉽지 않아졌다는 사실의 반증일 수도 있다. 왜일까? 왜 소통의 가능성은 확대됐는데, 정작 소통의 실현은 어려워진 것일까? 여기에는 언어의 동일성, 즉 우리가 같은(=동일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환상이 개입해있다. 조지 오웰은 나와 타자가 (완전히)같으면 소통은 무의미하며, 나와 타자가(완전히) 다르면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의미 있는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나와 타자가 달라야 하고, 가능한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나와 타자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소통에 대한 고민의 출발은 나와 타자의 ‘같고 다름’에 대한 사고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소통은 ‘나’와 ‘너’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통이란 일종의 번역이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나의 언어로 번역해 말하고, 그것을 다시 ‘너’의 언어로 번역해 이해하고, 머릿속으로 옮기는 과정. 나와 타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같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형태의 소통, 즉 내 머릿속의 생각이 고스란히 네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형태의 소통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생산적이지 않기에 무의미하다. 생산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반드시 차이가 부각돼야만 한다. 강의실에서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 다른 소통에 대한 욕구, 책상 밑으로 부지런히 문자를 찍는 손은 아니다. 침묵으로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 그것이 강의실에서의 소통을 어렵게 한다. 강의는 교수의 몫일뿐만 아니라 차이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학생들의 몫이기도 하다.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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