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세계를 바꿔놓은 기상현상

지난 몇 년 동안 영국을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이 몇 있다는 이유로 지구환경과학 BK21 사업단과 영국 사우스햄튼 대학 사이의 국제교류활성화 책임을 떠맡은 탓이었다. 이럴 때면 자투리 시간을 쪼개 아끼는 학제(學弟) 일우가 공부하는 캠브리지를 방문하여 회포를 푸는 일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3년 전 겨울, 그 날도 캠브리지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내 서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때 문득 『엘니뇨』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자연스레 손이 그리로 간 것은 물론이다. 캠브리지로 가는 기차 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어진 몇몇 기차여행은 그 책을 읽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디카프리오와 윈슬렛이 주연한 영화 ‘타이타닉’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하지만, 타이타닉 참사가 일어나는데 엘니뇨가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엑손발데즈호 대형 기름 오염사건의 배후에도 엘니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엘니뇨가 직접 사건을 일으킨 것은 물론 아니었다. 엘니뇨가 살짝 바꾸어 놓은 자연의 무대에 인재가 겹치면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들이었다. 쿠퍼-존스턴이 쓴 책 『엘니뇨』는 바로 타이타닉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엘니뇨는 바다와 대기가 서로 손을 잡고 지구환경 속에 만들어내는 거대한 맥박이다. 과학자들이 이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지난 1000년 이상을 거슬러 그 자취를 찾아보았을 때 인류 역사의 곳곳에서 엘니뇨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나폴레옹에게 퇴각의 쓰라림과 함께 실각의 계기를 안긴 러시아 공략 실패와 히틀러가 세계정복의 꿈을 접어야하는 계기가 됐던 러시아 침공 실패의 배경에 엘니뇨가 있었다. 풍요한 문명을 누리다가 뚜렷한 이유 없이 역사에서 사라져간 남미 문명의 쇠망에도 엘니뇨가 주역을 담당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인류의 역사가 지구환경의 변화와 얼마나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사례들이다. 엘니뇨를 주로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공부하던 내게 이 책은 자연과 인간의 생활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워줬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껏 넓혀주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독자들은 구하기도 어렵고 번역도 되어 있지 않은 책을 소개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실은 이 책에서 받은 “감격”에 흥분해서 일우와 번역책을 발간할 출판사를 물색해 한 출판사로부터 출간 약속을 받았다. 책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일념에 졸필을 무릅쓰고 서둘러 번역에도 일조를 해보았다. 그런데 “손익분기고지의 점령”이라는 절대적 명제를 안고 있는 어려운 출판계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책이 언제쯤 나오겠는지를 물어보기도 그만 지쳐버렸다.

불행하게도 “이공계기피현상”이라는 이상한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는 시대가 됐다. 우리의 삶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이런 책들이 많은 독자들을 가질 수 있을 때, 사명감을 가지고 이런 책들을 과감히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늘어날 때, 이런 서적들이 좋은 열매를 맺어 자연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쳐보라는 권고를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부모들이 많아질 때, 바로 그 때 우리 사회에서 부끄러운 용어들이 사라지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아직껏 버리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꿈 속을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경렬 자연대 교수ㆍ지구환경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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