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으로서의 사랑
니클라스 루만 지음┃
정성훈 옮김┃새물결┃340쪽┃2만2천원

파편화된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연애는 얼마 남지 않은 소통의 창구다. 인간 소외 속에서 사랑의 소통을 향한 갈망은 서점 한 켠을 차지하는 각종 연애지침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달 15일 사회학적 관점에서 사랑을 하나의 ‘소통 코드’로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고전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20여년 만에 원어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로 손꼽히는 루만은 사회를 소통으로 이뤄진 체계라 설명하는 체계이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체계이론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법, 경제, 정치 등 기능적으로 분화된 여러 체계로 구성된다. 루만은 이런 체계의 기능 분화가 법률, 권력, 화폐 등과 같은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가 소통 자체를 ‘자기생산’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사랑을 소통매체의 한 형식으로 바라본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그에게 있어 사랑이란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코드화’된 소통매체다. 저자는 이미 중세부터 이런 사랑의 ‘코드’가 여러 사람에게 학습 되고 널리 퍼졌다고 설명한다. 중세 연가문학에서 항상 귀부인에게 사랑과 충성을 서약하는 기사가 등장하는 등 소설 속의 인물들은 시대적 ‘코드’에 맞게 사랑하는 방식을 보여줬고, 사람들은 소설을 연애의 학습 교재로 사용했다.

사랑의 코드는 시대적·사회적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사랑의 코드 형식이 ‘이상화’에서 ‘역설화’로 이행되면서 사랑은 점차 독립적 영역으로 구축됐다. 중세에 ‘이상화’된 사랑은 여성에 대한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시하는 등 종교적 가치·도덕관념과 합일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사랑의 주제가 이성적 숭고함과는 거리가 먼 열정의 무절제함을 강조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열정적 사랑의 자기파괴적 속성에도 연인들이 사랑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역설적 형식이 점차 사람들의 행동양식으로 코드화됐다. 이렇게 역설을 내포한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코드가 널리 퍼지면서 사랑은 더 이상은 도덕,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지배받지 않는 독립적 영역으로 분화됐다.

루만은 개인주의 이념이 확고히 자리 잡은 현대사회에서는 ‘열정으로서의 사랑’ 역시 그 자체로 절대화되기보다 한 개인이 가진 감정의 일부로 간주된다고 설명한다. 익명성과 비인격적 관계가 지배적인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고독한 개인이 타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하는 친밀성의 코드가 됐다. 루만은 친밀함의 코드를 자신의 세계를 잃지 않으면서 타인의 세계에서 체험을 공유하는 ‘상호침투’로 정의한다. 연인들은 상호침투의 관계 속에서 각자 고유의 세계를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제목 때문에 연애지침서인 줄 알고 책을 집어든 독자들은 난해한 사회학적 용어들 앞에서 난색을 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루만은 책에서 연인과 어떻게 소통해야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 방법론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 간 소통 자체에 바로 그들이 원하던 사랑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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