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작
대학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작
  • 대학신문
  • 승인 2009.11.28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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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권보경




어느 날 아침, 금정자가 프레스기에 눌리는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침대 속의 자신이 납작해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 프레스기를 본 건 중학교 2학년 가을에 견학을 갔던 포항제철에서였다. 10년도 더 지나버린 지금 정자가 제철소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엄마가 억지로 집어넣던 수정탕 열탕마냥 답답했던 실내 공기, 그녀의 담임 마변태를 저주하는 데 요긴히 쓰였던 포항제철 안내책자, ‘대한 뉘우스’의 흑백 영상 같던 공장 내부,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거대한 프레스기였다.

사실 정자는 제철소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아니, 그게 제철소가 아니라 조선소였든 자동차공장이었든 아니면 쥐포 제작공장이었더라도 마찬가지다.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끌려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썩 마땅치 않았고, 그 무렵 정자의 관심은 오직 오빠들의 방송 스케줄과 따끈따끈 신곡을 외우는 것, 그리고 조만간 발매될 콘서트 씨디를 장만할 대책 마련뿐이었다.

차라리 나를 던져요! 마변태는 정자와 미숙이 몰래 보고 있던 오빠들의 사진집을 빼앗아 프레스기에 던져 버리겠다고 했고, 감히 오빠들의 사진이 마변태의 손에 훼손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우리의 정자는 온 몸을 던져 장렬히 싸우다 결국 씨디까지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그 날의 분한 기억이 정신적 외상(外傷)으로 남아서일까. 정자는 가끔은 참치캔을 타고 가끔은 여행가방에 실려, 또 가끔은 레드카펫을 걷다가 프레스기로 빨려 들어가는 꿈을 꾸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날 아침은 꼭 푹푹 찌던 제철소에서처럼 주룩주룩 땀을 흘리며 잠을 깨곤 했다.

정신 차려 금정자! 간밤의 악몽을 털어내려는 듯 정자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고개를 흔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통수는 물론 목이며 귓등까지 모두가 바닥에 붙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설마 마비가 온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에 정자는 상체를 조금 일으켜 보았다.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움직여졌다. 간 떨어질 뻔 했네. 엄마가 깨우기 전 10분이라도 더 달콤한 아침잠을 누리고자 다시 몸을 눕히던 정자의 동공이 점점 커진다. 맞은편 이불 밖으로, 몸이 누워있다면 마땅히 하늘을 향해 있어야할 발가락들이 바위에 붙은 미역마냥 땅바닥에 척 하고 달라붙어 있는 것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짝짝! 잘 말린 건오징어 두 마리가 부딪히는 경쾌한 타격성과 함께 뺨이 얼얼하다. 이럴 수가, 꿈인데도 뺨이 아프다니. 지구온난화와 환경호르몬이 고작 스물다섯 꽃다운 여인의 가엾은 뇌세포를 조로(早老)하게 한 것이다. 꿈은 깨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뺨만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가엾은 제 뺨을 어루만져주려던 정자는 제 얼굴로 다가오는 유령 같은 손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란다.

당황한 눈동자가 흔들리며 주변을 살핀다. 화장대 옆에 뒤집힌 채 벗어진 양말이며 자기 전에 벗어 둔 옷걸이 위의 브래지어, 잠들기 직전에 마셨던 물컵까지 모두 그대로다. 귀신에 홀렸나. 정자는 벙벙한 얼굴로 일어나 거울 앞에 선다. 차렷, 열중쉬어, 차렷.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앞으로 나란히.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제 몸을 살폈다. 이건 꼭 종이인형 같잖아. 프레스기로 밀어버린 듯 납작해진 정자는 뒷모습이 회색 마분지가 아니라는 점만 빼고는 딱 어릴 적 갖고 놀던 종이인형 꼴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 납작해지기만 했지, 넓적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꾹 찍어 누른 호떡처럼 넓적해지기까지 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텐데, 마치 늘씬하던 오징어가 뚱뚱한 건오징어가 되듯 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날씬해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에 위로가 된다.

“금정자, 6시 반이다. 아침 먹고 출근해야지!”
“안 돼!”
평소처럼 자신을 깨우러 오는 엄마의 발소리에 정자는 확 정신이 든다. 이 꼴을 어떻게 부모님께 보인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방문은 사수해야 한다. 정자는 사력을 다해 몸을 던져본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엄마는 이미 손잡이 반대편을 돌려 잡고 있었다. 정자는 온 몸의 체중을 실어 어떻게든 문이 열리는 것만은 막고자 필사적으로 버틴다.
“너 이거 안 열어?”
“잠깐만.”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지금 당장 씻고 튀어나가도 7시 차를 탈까 말깐데.”
“알아, 나도 안다고. 나 벌써 일어났어. 그러니까 잠깐만.”
“얘가 월요일 아침부터 왜 이래?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하여간 그럴 사정이 있다니까.”
“사정은 무슨 사정? 여보, 이리 와서 문 여는 것 좀 도와줘요.”

김유신 장군의 62대손이라는 엄마는 언제나 임전무퇴다. 62대쯤 지났으면 그 피가 좀 희석될 만도 하건만, 원.
“얼른 준비해.”
아빠의 저음은 짧고 단호했다. 만면에 승리의 미소를 띠며 개선문을 넘어온 엄마도 정자의 이마만 가볍게 한 대 쥐어박고는 예의 승자다운 너그러운 아량으로 포로를 놓아준다. 부질없는 노력에도 점점 뒤로 밀려가는 문손잡이에 매달린 채,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되지도 않는 말들을 뒤적거리느라 식은땀을 흘리던 정자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부모님의 반응에 그만 어안이 벙벙하다.

“으이구, 잠 좀 깨, 잠 좀.”
엄마는 넋을 놓고 있는 정자를 한 대 더 쥐어박고는 유유히 방문을 나간다.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던 정자는 다시 한 번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본다. 분명 아까 그 상태 그대로다. 그렇다면 내 눈이 잘못된 건가. 거울 앞에서 다시 한참을 눈만 껌뻑껌뻑하던 그녀는 제 눈이 문제인지 몸이 문제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장롱 뒤로 들어가 보았다. 으아악! 장롱 뒤에 숨어 있던 벌레 한 마리가 느닷없는 불청객의 출현에 놀라 달아난다. 혹시 방금 도망간 녀석이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는 아니었을까.

여의도역 3번 출구를 나와 시민은행으로 가는 길,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의 부산한 발걸음이 생의 마지막을 우아하게 착륙한 낙엽 위를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간다. 이제 5분 남았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템포를 올리는 정자의 발소리가 또각또각 경쾌하다. 힐을 신고 능숙하게 인파를 헤치는 그녀의 걸음걸이에서 일종의 노련미가 느껴진다. 쾌청한 가을 햇살이 사람 수만큼 많은 그림자를 드리우면, 그네들 또한 제 자리를 얻기 위해 치열히 다툰다. 21세기의 세상은 어딜 가나 경쟁사회인가 보다.

정자는 분주한 와중에도 발밑에서 벌어지는 그 치열한 경쟁을 예의 주시한다. 모퉁이를 돌자 아까까지만 해도 남들과 같이 경쟁에서 이기려고 버둥대던 그녀의 그림자가 문득 탈속한 선승의 몸짓마냥 겸손한 실선으로 변한다. 그때, 또각또각 다가오던 맑은 힐 소리가 정자의 그림자를 사뿐히 즈려밟으며 승리의 탄성을 울린다. 근데 얘, 너 선 밟았어.
“좋은 아침!”
입사 동기 김양이었다. 그래, 좋은 아침이지. 정자는 괜스레 입안이 텁텁하다.
“언니, 좋겠다!”
김양의 목소리는 제 발걸음만큼이나 높고 경쾌했다.
“응?”
밑도 끝도 없는 김양의 말에 정자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런 정자를 향해 김양이 살짝 눈을 흘긴다. 장난기어린 웃음이 눈주름을 타고 물결무늬로 흐른다.
“언니, 정말 사람이 달라졌어.”
“으응, 그,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러니까 사실은 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김양의 말에 방심하고 있던 정자의 혀가 꼬인다.
“언니, 뭘 그런 걸 굳이 변명을 하고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지.”
“으응…….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이게 무슨 병 주고 약 주고인지. 그나저나 김양은 말끝마다 언니, 언니다. 사실 액면가로만 보면 정자보다 서넛은 더 돼 보이는 김양은 제가 어리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인지, 생일이 고작 한 달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도 꼬박꼬박 정자를 언니라고 부른다.
“가을인데, 나도 누구 없나?”
먼 하늘을 향해 몸을 트는 김양의 몸짓은 정자가 들으라는 듯 연극적이다.
“근데 김양아.”
“응?”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정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많이 이상해?”
정자의 망설임에 무슨 질문일까 긴장하고 있던 김양이 피식 웃는다.
“왜, 뭐가 어때서. 괜찮아, 괜찮아. 이정도면 딱 좋은걸? 용기를 가지라고.”
응?
“본인만 처음엔 좀 어색해서 그렇지, 남들은 잘 몰라. 특히 남자들은. 그냥 좀 예뻐졌구나 생각하지. 나야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아는 거지만 말야. 언니 이거, 비비안 웨스트우드 목걸이, 이건 안나수이 스카프잖아. 그리고 이건 내가 너무 너무 사고 싶어 했던 마크 제이콥스 신상 코트. 이번 달 월급 받으면 사려고 찍어뒀는데, 언니한테 잘 어울리니까 내가 특별히 양보할게”
“어어……. 그래…….” “근데 이거, 설마 L이 사준거야?”

김양이 부러움 섞인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아, 그 얘기였어? 사실 L은 입사 동기 남자 중 최고의 킹카였다. 입사 초기, 키 크고 잘생기고 매너 좋고 집안 빵빵한 그를 노리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당시 그는 이미 3년 사귄 여자 친구가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느냐며 그를 찍던 여자들도 하나 둘 새로운 짝을 찾아 떠났고, 그러다 보니 막상 그가 이별했을 때는 어떻게 정자가 그의 쓸쓸한 옆자리를 지켜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남녀가 야밤에 자꾸자꾸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밤이라는 게 원래도 사람 마음을 요상하게 하는 법인데, 조명발 화장발 옷발에 술기운까지 정자를 도와 급기야 지난주에는 그가 정자에게 프러포즈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언닌 좋겠수.”
김양의 입술이 부러움으로 샐쭉 부풀어 오른다.
“하여간 여자는 사랑을 해야 한다니까. 언니, 예전보다 훨씬 분위기 있어진 거 알아? 뭐랄까, 꼭 오드리 헵번 같은 느낌.”
부러움 섞인 김양의 시선에 괜히 정자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L,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내가 오드리 헵번 같아서 나랑 사귀자고 한 건가? 우쭐해진 기분으로 들어온 사무실 정자의 자리에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와 조그마한 카드가 놓여있다.
“금정자씨, 좋겠어.” 옆자리에 앉은 정대리가 괜히 말을 거든다.
-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되시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따뜻한 로맨틱가이 L과의 첫 데이트다. 오늘 처음으로 정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힌다. 창가로 비치는 햇살이 포근하다.

언제나 그렇듯 직장에서의 한 주는 순식간이다.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헤매다 보면 야근 혹은 퇴근, 또 그렇게 정점인 수요일을 지나 벌써 목요일이다. 그리고 정자는 새로운 몸에 점점 적응돼 가고 있다.

그 사이 정자는 인터넷으로 지금의 몸에 잘 어울리는 옷 몇 벌과 신을 주문했다. 새로운 몸으로 할 수 있는 테크닉도 몇 가지 몸에 익혔다. 닫히는 지하철 문틈으로 끼어들기, 문을 열지 않고 문첩 틈새로 방에 들어가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남자 화장실 엿보기 등 익혀두면 언젠가는 피가 되고 살이 될 법한 자잘한 생활의 기술들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몸에 익숙해져 갈수록 정자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낯설기만 하다.
“웬일이야, 바쁜 회사원이 평일에 다 보자고 하고.”
오빠들을 지키기 위해 마변태와 맞서 싸우던 동지 미숙은 정자가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중학교 친구다. 삼수를 해서 아직 대학생인 미숙은 그래서일까, 사회생활을 하는 정자보다도 더 어른스럽다.
“사실은 나 고민이 있어서.”
“왜, 연애상담?”
역시나.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닌데 웬일로 네가 나를 먼저 불렀어?”
그랬다. 사실 미숙은 중학교 때부터 이미 ‘강태공’으로 불리었다. 오빠들만이 내 영혼의 반쪽이라고 외치면서도 남자친구가 끊이는 날이 없었다. 정자는 그런 미숙에 대해, 오빠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오빠들을 향한 마음이 너무 순수하지 않다며 친구들 앞에서 미숙의 흉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을 관통했던 스물여덟 유부남 수학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 상담에서부터 첫 키스 직전 테크닉 강습, 그리고 한 때 아찔했던 절체절명 양다리의 긴급비상회의까지, 미숙은 정자 연애사의 고비마다 그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런데 미숙은 알고 있을까? 오빠들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또 남자를 사귀냐며 욕했던 그 때 그 남자애를 사실은 나도 좋아했다는 걸.
“미숙아, 우리 진짜 불알친구잖아.”
“응, 그야 그렇지. 근데 그건 왜?” “넌 알 거 같아서…….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말이야, 내 몸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
“글쎄…. 너 혹시?”
미숙의 눈이 가늘어지며 정자를 살핀다.
“응. 말해 봐.”
“너, 설마 임신했니?”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럼 혹시 성병이라도 걸린 거 아냐?”
에휴. 정자의 호흡이 무겁게 깔린다.
“아니구나. 아님 됐지, 뭘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고 그러니. 생전 연락 하나 없던 애가 갑자기 보자고 하니 뻔하다 싶었지. 뭐 어디 너만 그렇겠니? 원래 우리 나이 때 화두는 뭐니 뭐니 해도 연애지. 맘에 드는 남자랑은 도도한 척 작업하는 거고, 맘에 안 드는 착한 남자랑은 적당히 연애 상담이나 하는 거고, 그런데도 여자친구를 불렀으면 십중팔구는 남자들한테는 못할 얘기 있다는 거구 ”

하긴, 여중을 다니던 그 때부터 미숙의 지론은 ‘여자들 간의 우정은 세상 모든 남자들이 죽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고로 여자들 간의 의리란 남의 남자 안 뺏고, 남의 사생활을 뒷소문 내지 않는 걸로 족한 법, 그 이상을 원한다면 멍청이 아니면 레즈비언이라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차라리 미숙은 솔직했고, 의리 하나는 믿어도 되는 년이었다.
“놀라지마.”
“무슨 뜸을 그렇게 들여, 그래 뭔데?”
슬슬 지루해진 미숙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정자는 아무 말 없이 좌향좌, 살짝 몸을 틀었다.
“화장실 가고 싶니?”
“미숙아.”
“응?”
“내 몸, 이상하지 않아?”
“음……. 글쎄.”
“자세히 좀 봐봐.”
“너 근데 정말 절벽이구나. 하긴 너도 걱정할 만하겠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정자는 갑자기 미숙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미숙의 뇌는 분명 핑크빛 하트모양일 거다.
“다른 건 뭐 달라진 거 없어?”
“글쎄……. 네가 원래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옛날 내 얼굴도 기억 못하는데 너 달라진 걸 어떻게 기억하겠니.”

하지만 난 네 옛날 얼굴을 기억하는 걸. 그 사각 턱에 작은 눈, 코 옆에도 큰 점이 있었지 아마. 특별히 내 기억력이 좋은 건 아냐. 다른 친구들도 아마 다 기억할 거야. 그 얼굴로 연애는 잘도 한다고, 우리는 늘 너에 대해 경탄했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요즘은 성형해도 별로 티도 안 나고 부작용도 없다고.”
“아, 그래.”
그때부터 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숙은 줄곧 여자는 몸매, 남자를 잡으려면 섹스어필이 최고, 정 수술이 무서우면 뽕브라라도 사라고 부르짖어 외쳤다.
“그럼, 잘 먹었어. 난 약속이 있어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사뿐하고 우아하게 계산대를 스쳐가는 미숙의 뒷모습이 도도하다. 정자가 카드를 긁고 나와 보니 이미 미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안, 우리 자기가 너무 빨리 와버렸네. 나 먼저 갈게. 그리고 오늘 한 얘기 흘려듣지 말고.

뒤늦은 미숙의 문자 메시지에 놀란 핸드폰이 파르르 몸을 떤다. 쳇! 총총한 가로등불 아래 제 키보다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자네 아파트 모퉁이 화장품 가게 앞에 그녀의 키만한 오드리 헵번이 검은 클리비지룩 V넥 원피스를 입고 우아하게 서있다. 그녀의 단아한 자태 위로 ‘세기의 아름다움을 선물합니다 - 로맨틱 로마나 화이트닝 세럼’이라는 문구가 꼬물꼬물 고운 무르팍을 기어간다.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L은 자신의 이상형이 오드리 헵번이라고 했었다.

그래, 난 오드리 헵번 같은 여자가 될 거야. 우아하고 도도하고 기품 있는 여자. 누구랑은 다른, 깊고 그윽한 눈길로 상대를 바라봐주는 오드리 헵번 같은 여자가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미숙의 데이트는 잘 되고 있을까? 지금쯤 그 남자와 영화를 보며 살짝 제 어깨를 기대고 있을까? 그 사람 앞에서는 수줍은 척 내숭도 떨까? 잠자리에서 미숙은 어떤 얼굴을 할까? 정자는 제 발걸음 소리만큼 또박또박 미숙을 곱씹는다. 그런데 미숙이 같은 아이도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울었을까. 수술을 하기 전날 밤엔 두려워서 잠 못 들지는 않았을까. 늘 당당하던 그 아이에게 친구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날은 없었을까.

어쨌거나 내일은 나도 드디어 첫 데이트야. 내일은 꼭 L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텐데. 그런데 말이야, L은 어떻게 생겼었지? 밤이어서 그런가, L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모르겠다, 내일 화장을 잘 받기 위해서는 잔말 말고 어서 잠이나 자야지.

다음날 아침, 정자의 심장이 드럼 소리마냥 탄력 있는 박동으로 설렘을 몸 구석구석까지 실어 나르는 바람에 웬일로 그녀는 새벽 어스름부터 잠에서 깨어 있었다. 하지만 이른 시간부터 오드리 헵번 같은 V넥 원피스를 입고 제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정자의 눈빛이 조금 의기소침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정말 완전평면이다. 깊게 파인 V넥 사이로 살짝 가슴골이 비쳐야 하는 옷이지만 지금의 정자에게 그런 볼륨감 따윈 있을 리 없다. L에게 오드리 헵번처럼 보이고 싶은 정자에게 이건 여간 난감한 문제가 아니다.

어떡하지? 몇 번이나 다른 옷을 갈아입어 보았지만 어젯밤 내내 꿈속에서 이 블랙원피스를 입고 도도한 영국의 공주마냥 로마를 누비는 꿈을 꾸어서일까, 정자는 어느 것도 눈에 차지 않았다. 브래지어로 받혀주고 모아줄 것도 없다는 절망감이 있지도 않은 정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때였다. 정자의 눈이 문득 첫새벽 태양처럼 번득이며 광채를 냈다. 정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로 눈썹 펜슬이었다. 원래 화장이란 것이 있는 것도 없게 하고 없는 것도 있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있는 눈썹을 깎아 없는 눈썹을 그려 넣고, 있는 광대뼈를 깎아 없는 콧대를 세우듯 말이다. 정자는 걸치고 있던 원피스를 잠시 벗어두고는 눈썹 펜슬로 전위예술을 시작한다. 퇴화의 흔적마냥 남아있는 양쪽 젖꼭지 사이로 정자는 조심스레 시옷자를 그린다. 너무 선이 진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골고루 음영까지 넣는 그녀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할 때도 저 혼자 화가가 되겠다고 하던, 아티스트 금이었다. 시작한 김에 심혈을 기울여 메이크업까지 마친 후 정자는 다시 원피스를 걸친다.
-오늘 데이트 기대하고 있어요. 7시에 주차장 앞에서 봐요.
정자의 책상 위에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놓여있는 카드 속 L의 글씨가 또박또박 다정스럽다. 정자의 납작한 심장이 그녀의 발가락 끝까지 행복을 펌프질한다.

저녁 7시, 회사 주차장 앞. 아우디를 끌고 나온 L이 정자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다시 제 자리로 들어온 L은 이번에는 그녀의 안전벨트까지 채워준다. 안전벨트를 집기 위해 다가온 L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 감은 눈가에도 L의 체취 같은 CK one 향기가 스미자 어느새 정자의 뺨이 발그스름해진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킬까 부끄러운 정자가 수줍게 몸을 피한다.

처음 들른 곳은 분위기 있는 홍대 앞 스페인 레스토랑이었다. 와인을 추천하는 L의 능숙한 미소에 자신감이 묻어난다. 길쭉하게 생긴 모스카토 다스티 스파클링 와인이 길고 단아한 유리잔에 담겨 퐁퐁 은빛 물방울을 쏟아내고, 그 뒤를 잇는 연어 샐러드, 송아지 스테이크, 토마토소스를 얹은 빵,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콤한 디저트 케이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 음악이 뭔지 알아요?”
레스토랑 창유리에 비친 늦가을의 크리스마스 전구마냥 환상적인 밤이다.
“글쎄요?” “드뷔시가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에 취해서 지었다는, 기쁨의 섬이라는 곡이에요.”
고작 스파클링 와인 한 잔에도 L의 얼굴은 열기로 발갛게 들떠있다.
“참, 일요일 저녁 예술의전당에서 둘째 누나가 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거예요.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인데, 괜찮으면 정자씨도 같이 와줬으면 해요. 정자씨와 함께 이 곡을 듣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정자씨를 제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으니까요.”

아, 사랑스런 L, 이 복덩어리. 넌 어쩜 이렇게 근사하니. L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력이 뚝뚝 흘러넘쳐, 정자는 그만 그 매력에 미끄러질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63빌딩 스카이라운지 재즈 바에서의 달콤한 칵테일과 한강변 아우디에서의 달콤한 우리의 첫 키스. 잠깐, 그런데 이건 너무 빠르잖아. 매끄럽게 이어지던 완벽한 데이트 코스처럼 한 손으로는 의자를 젖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자의 브래지어를 벗기는 그의 손이 능란하다. 봉긋하게 드러난 하얀 가슴이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고 L의 손길이 부끄러움으로 단단해진 젖꼭지를 감싸면, 어느새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렸어야 한다. 그랬어야 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정자의 가슴을 더듬던 그의 손길이 막 속도를 올리려다 과속 방지턱에 걸린 자동차마냥 비틀거린다. 그녀의 입속에서 피겨선수마냥 우아하게 스핀을 돌던 그의 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가엾은 선수처럼 점점 뻣뻣하게 마비되어 간다.

그리고.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 넘치던 L이 당황한 초짜마냥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깨달았다. 정자의 가슴 언저리로 귀여운 곰돌이 얼굴의 이모티콘이 - *ㅅ* - 아까부터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음을.


일요일 저녁이 되도록 L은 계속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예술의전당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둘은 아무도 말이 없었고, 그의 카오디오에서는 기쁨의 섬만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흘러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안해요’라는 짧은 문자 메시지를 끝으로 L은 슬픈 꿈처럼 희미하게 부서져갔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한 시절이 아스라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별이란 언제나 소나기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라 차라리 흠뻑 슬픔에 젖고 나면 끝날 일이지만, 이렇게 잘 가라는 인사 한 번 못하고 그를 보낸다는 서글픔이 못 다 남긴 스파클링 와인처럼 심장 아래 고여 퐁퐁 미련 한두 방울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한때 그녀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남자, 언젠가는 흑백사진같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겨질 사람, 운명처럼 사랑했던 그녀를 제 스스로 떠나야 했던 가엾은 남자 L을 위해 정자는 마지막 편지를 보내기로 한다. 늦은 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고운 편지지와 탐스럽게 익은 사과 두 알을 사서 돌아오는 길, 돌아서는 모퉁이에서 오드리 헵번이 세기의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그윽한 눈길을 가만히 마주대하던 정자는, 문득 이리도 처연한 이별의 슬픔을 견뎌내야 할 L에게 마지막으로 아주 특별한 선물을 선사하리라 마음먹는다.
-L에게. 이렇게 너에게 이별을 전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 한참을 난 익숙한 습관처럼 너를 찾게 되겠지. 안녕, 내겐 과분했던 사람. 너를 위해 먼저 떠나는 나의 아픔을 이해해 달라고 하진 않을게. 너에게 영원한 화인처럼 슬픔만을 깊게 남기고 떠나는 나를 용서하지 마. 사랑하는 네겐 해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이다지도 부족한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구나. 너를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여인을 선물해 줄게. 그리고 난 멀리서 너의 행복을 눈물로 기도할게. 굿바이, 내 사랑.

펜을 놓는 정자의 눈가가 촉촉하다. 잠시 눈물을 훔친 정자는 떠나는 L을 위해 정성어린 이별 선물을 손수 마련한다. 정자는 출출한 속에 방금 사온 사과 하나를 베어 물고는 나머지 하나를 반으로 자른다. 자른 단면에 본드를 발라 오드리 헵번의 가슴에 붙인 후, 그녀의 블랙 원피스에 어울리도록 눈썹 펜슬로 정성껏 덧칠한다. 가슴이 너무 딱딱하다고? 걱정 마. 네가 애정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고 입 맞춘다면 오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가슴이 될 거야. 그녀의 사과 가슴이 부드러워지면, 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겠지.

애절한 이별의 슬픔으로 넝마가 된 가슴을 간신히 여민 채 정자는 잠자리에 몸을 눕힌다. 쌀쌀한 날씨에도 방 안 공기는 수정탕 열탕처럼 답답하기만 한데, 어두운 실내는 어린 날의 제철소처럼 흑색 영상이다.

내일 아침에도 회사를 가야 하겠지? 복도에서 L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와 헤어졌다는 얘기가 순식간에 회사에 퍼지겠지? 비웃음 섞인 연민으로 자신을 바라볼 정대리나 김양의 표정을 떠올리면 저 장롱 뒤에 숨어 영원히 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안녕, 그레고르 잠자. 내 가슴에도 썩은 사과를 박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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