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선거 무효사태를 둘러싼 작금의 논란은 급박하며 혼란스럽다. 과연 투표함이 고의로 훼손됐는지, 그리하여 부정행위가 존재했는지, 누구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한 채 당사자들만이 자신의 정당성과 결백을 항변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53대 총학생회 선거관리위원회가 장문의 해명을 냈다. 이들의 해명은 논리정연하며 구체적이고 단호하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차분히 해명했고 확실한 대목에선 당당했다. 속살이 벗겨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대화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해명이 어딘가 어색하고 핵심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모래를 씹듯 곱씹어가며 해명을 시도했던 자신들의 대화 속에 녹아 있는 어떤 ‘부재’를 이들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선관위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공유하고 있는 이 ‘부재’의 정체, 그것은 ‘신뢰의 상실’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얼마나 신뢰를 잃었으면 누군가가 ‘도청’을 할 생각을 했겠느냐는 얘기다. 언제부터 학생선거가 이토록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총학생회를 믿어달라는 말을, 총학생회를 책임지겠다는 말을 누가 자신있게 할 수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도청을 꾸민 이들도 마찬가지다. 학생자치와 대학생의 사회적 책무를 외치는 이들이 왜 좀 더 정당한 방법을 택하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목적을 위해서는 부정한 방법도 동원할 수 있다는 이 위험한 생각의 뿌리가 우려스럽다. 무엇보다 부정선거의 결정적 증거랍시고 도청파일을 당당하게 내놓는 이들의 태도가 아연하다.

한술 더 떠 선거운동 기간에 각종 규칙위반으로 경고가 누적돼 등록말소될 뻔한 한 선본은 사태가 발생하자 “서울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도덕적으로 파산했다”며 당당히 후보사퇴를 선언했다.

이번 사태에 연관된 모든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이 ‘당당함’의 연원은 그들의 대화속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떳떳하다 하면 된다.”

서울대 사상 초유의 사태의 본질을 ‘선거관리 미흡’이라는 기술적 문제로 규정하고 선관위가 총사퇴함으로써 떳떳해질 수 있다는 믿음, 불법한 도청일지라도 목적이 정당하다면 떳떳하다는 믿음, 비록 선거과정에서 ‘세세한’ 규칙을 위반했을지언정 부정선거나 불법도청에는 관여하지 않았기에 자신은 떳떳하다는 믿음. 이 ‘떳떳하다’는 믿음이야말로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자 사태의 당사자 모두가 당당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학생들은 이미 서울대 총학생회의 종말을, 학생사회 민주주의의 몰락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떳떳함’에 매몰돼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사태가 보여준 진짜 위기의 본질이다.

김병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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