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또는 수건돌리기 놀이의 윤리에 대하여

1.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렸을 적 수건돌리기 놀이를 떠올려본다. 아이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있고 술래는 아이들 뒤를 돌다가 재빨리 수건을 놓고 도망친다. 이때 아이들은 술래가 자기 뒤를 지나갈 때마다 수건이 떨어졌는지를 살펴야 하며, 만약 떨어졌을 때에는 빨리 일어나서 수건을 들고 도망가는 술래를 뒤쫓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술래가 제자리에 앉기 전에 잡지 못하면 벌로 술래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수건이 떨어졌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있으면 술래가 한 바퀴 돌아와 등을 가볍게 치고 이로써 술래의 역할이 바뀐다. 봉준호의 영화는 수건돌리기 놀이를 연상시키는데,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어떤 극한적인 상황에 몰린 인물들이 무언가를 쫓는 구도를 갖기 때문이다. 마치 등 뒤에 수건을 두고 간 술래를 쫓는 사람들처럼, 술래가 제자리에 앉고 나면 그 자신이 술래가 되어야 하는 사람처럼. <플란다스의 개>에서 현남은 개 납치범을 잡아야 하고, <괴물>에서 가족들은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를 찾아야 하며, <살인의 추억>에서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아야만 한다. 봉준호의 네 번째 장편 영화 <마더> 역시 탐문극 형식을 띄고 있다. 혜자는 자신의 아들 도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쉴새없이 다양한 인물들(형사, 공변호사, 진태, 학생들 등등)을 만나며 범인을 쫓는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아들만은 결백하다는 혜자의 확고한 믿음,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이 두 모자에게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체조, 일명 ‘저주받은 관자놀이’는 이 여정에서 으뜸가는 ‘정신 지도 규칙’이다(도준이 구치소에서 자신을 바보라고 부른 죄수들과 싸운 뒤 면회 장면에서 혜자는 명시적으로 “명상”을 언급한다). 혜자가 감옥 밖에서 도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진력할 동안에, 감옥에서 도준이 해야 할 것은 오로지 기억을 해내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곳곳에서, 검은 화면과 디졸브의 화면 전환 등을 통해 꿈과 같은 정조를 연출한다. 영화에는 꿈과 실재, 오류와 진리 사이의 무수한 통행과 교섭을 상징하는 몽환적인 톤의 쇼트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사실이며,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혜자가 차례로 찾아내는 인물들은 사실은 범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며, 차례로 배제된다. 이처럼 확고한 진실을 찾기 위한 오류 극복 과정이 영화의 저변에 흐른다. 봉준호의 이전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추격전을 펼친 바 있다. 그런데 <마더>에서는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자신을 배신한다. 이 위험한 지식, 자신이 외면하려 했던 어두운 심연, 원죄의 지식을 알게 되는 순간 혜자를 지탱하는 토대는 와해되고 만다.

  영화 초중반부에서 우리는 영화 전체를 암시하는 몇몇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먼저 진태가 혜자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 이 ‘아무도’가 함축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단 하나의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믿지 말고 의심하라는 의미에서 무서운 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이 잔혹한 탐문극 속에서 구해야 할 아들 도준에게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한약을 먹으며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도준의 옆에 선 혜자가 두리번대면서 오줌 자국을 흙으로 덮어 지우는 장면. 어쩐지 우스꽝스럽고 서글프기도 한 이 장면은, 나중에 도준이 벌인 일을 혜자가 은폐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혜자가 품 속에 손을 넣는 장면 역시 어떤 은폐를 암시한다. 사실 <마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더>는 아들이 뒤집어 쓴 살인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 엄마가 종횡무진으로 범인을 찾으러다니고, 자신의 아들이 범인임을 알게 된 엄마가 증인을 살해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으로 향하기 전까지, 혜자의 순진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도준 같은 바보가 살인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사건이 벌어진 그날 밤에 대한 도준의 회상을 그린 시퀀스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회상 장면에서 술에 취한 도준이 술집 ‘맨하탄’에서 쫓겨나와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여고생을 쫓는다. “오빠랑 술 한잔 할래?”, “남자랑은 싫으니?”, “남자가 싫으니?” 도준은 묻는다. 바로 이 말이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때리기라도 했듯이 그 여고생은 잠시 멈칫하고, 그녀는 이내 어두운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어둠 속에서 순간 커다란 돌덩어리가 도준을 향해 날아든다. 어떻게 여학생이 이런 돌을 던졌을까 할 정도로 큰 돌이다. 도준은 겁먹은 얼굴로 뒤돌아 도망친다. 도대체 무엇이 일어난 것일까?  


2. 모성의 양면 또는 단면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은 이른바 ‘강간의 왕국’으로 표현된다. <마더>의 배경이 되는 마을 역시 억눌린 성욕으로 인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곳곳에 성적인 암시가 즐비하다. 술집 마담 딸과 끝말잇기를 해나가며 섹스하는 진태, 이를 엿보는 혜자, 이미 폐경기가 한참 지났을 혜자에게 접근하려는 리어카 끄는 노인 등등(비 내리는 날 혜자가 리어카 끄는 것을 도와주는 장면에서 이 둘은 마치 부부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아정의 핸드폰에 남아있는 마을의 수많은 남자들은 바로 ‘쌀’을 주고 아정의 몸을 샀던 이들이다. 이 마을에서 이상하리만치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는 성욕이라는 영향력으로부터 도준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형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발정난 똥개”인데,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날 밤, 술집 마담의 고등학생 딸에게도 껄떡거린다. 그런데 도준과 혜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도준은 여자랑 자 본 적이 있냐는 진태와 형사의 질문에 집에서 엄마랑 잔다고 대답하며, 심지어 그가 길가에 오줌누는 장면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혜자가 등장해서 ‘정력에 좋은’ 한약을 먹인다. 또한 도준이 망가뜨린 차 백미러 값을 구하기 위해 침을 놔준 사진관집 미선과의 대화에서, 혜자는 엄마인 자신조차 도준의 사슴같은 두 눈을 바라볼 때 가슴설렌다고 은밀히 고백한다. 1) 게다가 술에 취한 도준이 밤에 방으로 돌아올 때 직부감으로 찍어낸 잠들어있는 혜자의 숏, 그리고 여기에 자연스레 프레임-인되는 속옷만 입은 도준이 등장하는 이미지, 여기에는 단순한 모자 관계를 초과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마더>에서 숨막히게 나타나는 근친상간의 정조는, 너무나 전형적인 방식으로 아버지가 없고, 소유욕이 강하며, 다른 여자들과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방해하는 모성적 초자아의 모티브를 드러낸다. 정신분석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모성은 아들에게 있어 대개 잔혹하고 공격적이며 외상적인 것으로 체험되는데, 과연 이 둘의 관계는 어떠한 3자도 개입할 수 없는 상상적 이자 관계처럼 보인다. 도준과 혜자의 관계는 너무나 친밀하고 가까워서 마치 아직까지 탯줄로 연결된 하나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도준이 겪은 외상은 농약이 든 박카스가 아니라, 근친상간적 경험으로 인해 발병한 일종의 정신병의 흔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이름을 배척하는 것은 주체의 상징적 세계로의 성공적인 진입을 막고 정신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2) 게다가 혜자가 머무는 동굴같은 한약방은 공포스러운 자궁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키고, 약재를 작두로 잘라내는 장면은 거세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폐쇄적인 어머니와 아들의 이자관계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러한 점에서 <마더>는 오늘날 부권이 몰락해가는 포스트-오이디푸스 시대의 한 반영이고, 그래서 어떤 새로운 아버지의 형상이 요구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신분석은 너무나 들이대기 쉬운 틀이며 <마더>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시야에서 놓치게 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봉준호는 오히려 이러한 정신분석적 세부들을 그저 장식적으로 사용할 뿐, 정작 그것을 핵심으로 간주하고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억눌려진 성적 히스테리의 해방적 분출, 또는 승화가 모든 것을 여는 만능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마더>에서 직접적인 사회 풍자를 배제하려 했을지 모르나, 나는 <마더>가 봉준호의 이전 영화들보다 더욱 더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더>가 전작들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보면, 성의 문제는 외관과는 달리 단지 하나의 실마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봉준호의 세계에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범죄의 원인과 전치라는 구조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성욕과 가족의 자리에 다른 것이, 예를 들어 계급의 문제를 넣어도 이 틀 자체에는 아무런 균열도 생기지 않는다.3) 


3. 어떻게 속지 않는 자가 오류를 범하는가? 4)

  <마더>는 언뜻 보면 단선적인 서사 구조를 갖는 것 같지만, 촬영 및 편집의 치밀함은 관객들로 하여금 혜자에게 완전히 동일시하도록 하면서, 내내 터질듯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특히 극 초반에 혜자가 작두로 약재를 썰다가 도준의 교통사고를 목격하는 장면이나, 장롱 뒤에 숨어 진태의 정사를 엿보다가 물을 흘리는 장면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들 중 하나이다. 5) 또한 영화를 보고 난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2.35 : 1의 긴 화면과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우선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별히 서사가 클로즈업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도, 클로즈업들은 너무나 자주 등장하여 등장인물들의 불안, 공포, 죄의식 등의 정념을 그야말로 ‘쏟아놓는다’. 특히 2. 35 : 1의 긴 화면이 서사 구조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이 화면이 중요한 순간마다 사건 전체에 대한 전지적 시점을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 관람의 와중에 우리는 자주 답답함을 느끼며, 길게 옆으로 잘린 화면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자꾸만 맹목이 되고 만다. 이 맹목과 무지 속에서 비로소 관객들의 주관적 시점이 의미를 채워넣어야 될 공백들이 허용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봉준호 영화에 있어서 탐정 소설적인 서사 구조는 중요하다. 또한 겉모습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아서,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오인되었던 진실로 귀환하게 하는 여정은 히치콕이 자주 다루었던 테마이기도 하다. 선형적이고 일관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종류의 서사를 보여줄 수는 없다. 가령 고전적인 탐정 소설에서는 오인들의 필연적인 연쇄만이 사건의 해결을 보장하는데, 마땅히 거쳐야 할 우회로를 피하려 한다면 파국만이 있을 뿐이다. 진실에 ‘성급히’ 닿고자 하는 노력은 언제나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린다. 탐정은 그의 여정 속에서 잘못된 해답을 폐기해야 될 장애물로 보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잘못된 해답들을 통해서만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6) <마더>에서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마더>는 혜자가 형사를 만나고, 변호사를 만나고, 진태를 만나며, 흉터있는 여학생, 그리고 고등학생들을 차례로 만나는 구조를 갖는다. <괴물>에서처럼, 사법기구 및 경찰기구 등 공권력은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모든 것은 곤경에 빠진 혜자 스스로 돌파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즉 봉준호의 전편들에서처럼 ‘평범한’ 사람, 소시민이 다시 주인공이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혜자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은 혜자가 도착할 종착지를 위해 거쳐가는 정거장처럼 나타난다는 점이다. 영화는 마치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박진감넘치는 롤플레잉 게임처럼 느껴진다. 혜자와 도준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한때 사태 해결을 위한 희망으로 나타나지만, 그저 나름의 단서를 제공하고는 사라질 뿐이다.

  도준이 잡혀간 후, 처음에 혜자는 형사에게 도준의 결백을 호소한다. 그리고 공 변호사에게 가서 재판을 통해 결백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혜자는 범인을 직접 잡기로 마음먹는다. 먼저 그녀는 “종자”가 틀려먹었다고 한 ‘불량한 친구’ 진태의 집에 숨어들고, 유력한 증거로서 피 묻은 골프채를 발견한다. 이후 혜자는 진태가 자는 틈을 타서 도망치고 그를 경찰서에 신고하지만, 발견된 골프채에 묻어있는 피는 실상 립스틱 자국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이후에 풀려난 진태는 혜자에게 돈을 뜯어내면서 혜자의 탐문에 있어서 핵심이 될 몇몇 단서를 남긴다. 7) 살인은 대개 금전, 치정, 원한 세 가지의 원인으로 일어나는데, 그는 아정의 남자 관계를 언급하면서 그 살인이 치정에서 비롯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때 범인이 시체를 땅에 파묻은 것이 아니라, 보란 듯이 옥상 위에 시체를 “빨래널듯” 올려놓은 까닭은, 범인이 아정을 성적 대상으로 전시하기 위해서이다. ‘보란 듯이’, 모종의 전시 효과를 노리는 이 이미지는 중요하다. 이어서 진태가 혜자에게 전하는 말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 그리고 혜자가 직접 범인을 잡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후 흉터있는 여학생을 쫓던 본드불던 고등학생들은 혜자에게 쌀떡소녀라는 명칭의 유래, 그리고 아정의 핸드폰이 있는 중요한 단서를 혜자에게 전해준다.

  이렇게 밖에서 혜자가 분주할 동안에 도준 역시 ‘저주받은 관자놀이’ 운동을 통해서 중요한 것을 기억해낸다. 바로 혜자가 도준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박카스에 농약을 타서 죽이려 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혜자의 말에 따르면, 정확히는 동반자살이었다(“너는 난데, 세상천지에 너하고 나하고..”). 이 자살은 추측컨대 생활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아마 이 사건으로 인해 도준이 현재의 지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혜자와 도준이 대화하는 장면이 품고 있는 비극적 정조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것은, 그나마도 마음이 약해서 그라목손을 타지 못하고 싸구려 론스타를 타서 죽지 못했다고 농담조로 내뱉는 혜자의 대사이다. 이처럼 도준은 구치소의 독방에서, 그리고 혜자는 마을 곳곳을 누비면서 사건을 재구성하려고 진력한다. 봉준호는 이 둘의 시도를 각각 교차 편집하여 이 둘의 여정의 평행성을 부각시키고,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이르게 한다. 순간적으로 하얀 이미지를 떠올린 도준은 엄마를 부르면서 면회를 요청하고, 마침내 아정의 핸드폰을 찾은 혜자는 그 하얀 이미지의 정체가 자신이 이전에 도와준 적 있는 고물상 노인임을 알게 된다. 이에 혜자는 고물상 노인을 찾아가서 그가 범인임을 확신하려고 한다. 고물상 노인은 자신이 얼마 전 겪었다는 끔찍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진실을 부인하는 혜자에게 도준이 범인이라는 완전한 증거(저주받은 관자놀이)를 보여준다. 애드가 알란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편지를 가장 잘 숨기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 편지를 모두가 잘 보이는 가장 가까운 곳에 놓는 것이다. 이렇게 탐정이 모든 사건들의 공백을 메우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될 때,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애초에 시작했던 출발점이다. 혜자는 도준을 구하기 위해 잡으려고 했던 살인범이 다름아닌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도준이었음을 발견한다. 도준은 혜자 자신이기도 하므로, 혜자는 결국 자신을 잡은 셈이다.
 

4. 주체의 곤궁과 수건돌리기의 윤리 

  앞서 우리는 <마더>의 몇몇 형식적 구조를 살펴보았고,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가 모성의 과잉이나 광기가 아니며, 이에 따른 정신분석적 해석 역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보았다. 이제는 <마더>가 왜 봉준호의 전작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영화인지 살펴볼 차례이다. 주지하다시피, 봉준호의 영화에는 널리 알려진 ‘봉테일’이라는 수식어와 더불어 언제나 ‘사회비판적 영화’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그렇다면 모성과 가족을 제재로 삼은 <마더>는 이전에 비해 퇴행적인가? 봉준호의 <마더>가 그의 이전 영화에 비해서 더 나아간 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더>가 히스테리적 주체 8) 의 진정한 곤궁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을 관객들로 하여금 대면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봉준호의 전작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즉 군부 독재와 무능한 공권력, 주한미군으로 상징되는 미국 제국주의 등이었다. 악과 부조리, 고통과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 그 세계의 구조와 ‘나’의 결백은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이미 전제된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포획함으로써 근절할 수 있다고 가정되는 악을 부지런히 쫓는 일이다. 그런데 이 악은 늘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주체의 외부에로 전이되어 있다. 서두에서 밝혔다시피, 봉준호의 세계 속에서 악의 원인은 언제나 수건돌리기 놀이하듯이 돌고 돈다. 갑을 쫓고, 갑이 아니라면, 을을 쫓고, 을이 아니라면 병....... 그리고 이렇게 무한히 반복된다. 사건들은 늘상 진정한 ‘해결’이 아닌 형식적인 종결, 미제로 남는다. 이전 두 영화들(<살인의 추억>, <괴물>)의 끝맺음은 평온한 일상의 한강, 시골길을, 그리고 카메라를 먹먹한 눈길로 바라보는 송강호의 두 눈이었다. 그 말없는 응시는 괴물들과 살인범들은 우리 주위에 항상 이미 있다는 무서운 그리고 돌연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이 응시는 대략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살인자는 우리들 사이에 있다 또는 살인자는 우리 안에 있다. 첫 번째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으로의 이행에 <마더>의 시선이 위치한다. 봉준호의 전작들이 무력한 사회 시스템, 공권력의 무능에 대한 조명으로 요약된다면, 이러한 조건은 오히려 <마더>에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똑같은 시골이라도 오늘날의 시골이 80년대 화성과 같지 않다는 시대적 변화의 징후는, 현장 감식 장면에서 나오는 농담처럼, 요즘은 순경 애들이 CSI도 본다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포토샵을 통해 도준의 다섯 살적 사진을 복원시키는 장면에서 사진관 주인 미선이 말한 것처럼 “안 되는 것 빼고 다 되는” 시대인 것이다. 예컨대 살해 현장이 언제나 엉망으로 되어있던 <살인의 추억>과 달리, <마더>에서 현장은 너무나 보존이 잘 되어있다. 오늘날 과학은 건재하고, 사회를 직조하는 테크놀로지들은 더욱 정교해졌다. 또 독재정부는 몰락하고 ‘형식적’ 민주주의는 성취된 것처럼 보인다. 9)

  시대적 변화에 대한 감수성과 더불어, <마더>는 사회의 광기를 운위하기 이전에 우리 속의 광기가 문제가 아니냐고 질문한다. 혜자는 도준이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아이라고 하면서, 고물상 노인에게 “내 아들의 발톱의 때만도 못한 새끼”라고 윽박지른다. 혜자의 ‘숭고한’ 도준 사랑은 도준이 범인임이 밝혀지는 순간의 광기어린 살인으로까지 나타난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우리에게 친숙한 ‘엄마’가 아니라 무언가 이물감을 주는 영어 단어 ‘마더’mother(또는 머더murder)이다. 혜자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숭고와 광기는, 어쩌면 모성의 양면이라기보다도 애초에 제한되지 않는 모성의 한 가지 모습이다. 정상과 잉여로 구분될 수 없는, 애초에 과도한 것이 그 본성인 이 모성은, 극의 마지막에 가서 거대한 심연을 만난다. 그것은 바로 결백하다고, 자신이 구해주겠다고 다짐했던 도준의 무서운 죄의 진실이다. 그 도준의 죄는 어떤 의미에서는 혜자 자신의 죄이기도 하다. 단순히 도준이 혜자의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살인의 발단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혜자가 도준에게 심어준 규칙, 누군가가 그를 “무시하면 작살내고 한 대 치면 두 대 치”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도준은 그저 그 명령을 곧이곧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혜자의 광기를 예견하듯, 그녀가 어떻게 해서든 외면하고자 하는 원죄의 외상적 순간은 농약이 든 박카스 병을 응시하는 도준의 플래시백의 형태로 반복해서 회귀한다.

  종종 도준은 누군가가(혜자도 포함해서) 자신을 바보라고 부를 때 스스로를 잃을만큼 분노한다. 도준과 혜자에게 중요한 것은 무시와 배제에 대한 거부이며 한 공동체 성원으로서 인정해달라는 애타는 요구이다. 도준은 취조 과정에서 자신도 스스로 읽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여자랑 잘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한다. 바보가 아니고 진짜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자랑 잘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도준이 원하는 인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다 분명해진다. 그것은 쌀떡소녀를 둘러싸고 마을 전체 남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음란한 쾌락에 참여하고픈 욕망이다. 그것은 도준의 욕망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도준을 욕망하는 혜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진태의 말마따나 한마디로 “좆같은” 이 마을은, 어떤 형태의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엄청나게 많은 아들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여성은 다만 자식에게 헌신적인 엄마이거나, 또 엄마가 되길 기다리는 여자이거나(사진관 주인), 아니면 쌀떡소녀일 뿐이다. 다시 말해 <마더>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사물이거나, 아니면 재생산의 도구일 뿐이며, 남성들은 하나같이 성적 쾌락을 갈구하는 철없고 책임감없는 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미 벌어진 강간과 살인의 책임은 대체 누가 지는가? 

  모두들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고, 살인범이라고 부르기에 도준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몇 바퀴 돌아서 죄가 자신에게 온다고” 하소연한다. 가령 재판이 열려서 도준이 아정을 살해하는 상황을 사법적으로 무의식 상태로 판단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무의식과 정신병적 상태는 모든 책임의 면제를 의미하는가? 스스로를 문제삼고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은 모든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히스테리적 위치로부터 전진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한 걸음에 해당한다. 객관적으로 사태의 외부에 안전하게 위치해서 세상을 관망하는 의식은 불가능하다. 진정으로 윤리적인 주체는, 스스로가 상황 속에 완전히 연루되어있음을 인지하고, 심지어 자신의 무의식(적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이미 그것은 정치에서 윤리로의 퇴행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예외없는 철저함, 아무 것도 믿지 말라는 태도의 급진화이다. 미쳐버린 사회를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로서 승인하는 형식적인 행위는 사태를 완전히 다르게 보도록 한다. 다시 영화 속 형사의 말을 빌리면, 누구나 살인할 수 있다. 무슨 “자격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부장제와 몰상식한 모성에 관한 사회적 무의식에 일정 부분 책임을 공유한다. 봉준호의 세계 속에서 수건돌리기가 성공적이 될 수 있는 가능 조건은 나는 술래가 아니라는 확신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도망친다. 또 누군가는 술래가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나 아니면 누구라도 좋을 다른 사람에게 수건을 떠넘기고 있다. 누군가는 이 수건돌리기를, 그 멈추지 않을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더>의 세계 속에서 수건돌리기라는 상부구조를 떠받치는 이른바 ‘토대’, 죄와 악의 지독한 악순환은 오로지 사회의 최하층에서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건돌리기 놀이는 너무나 폐쇄적인 악순환이다. 아정의 장례식장에서 혜자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래도, 여러분들만은 헷갈려선 안돼!”라고 외친다. 이 이상한 동류의식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아정의 친척들과 혜자가 벌이는 한바탕의 다툼과 이어지는 장면에서 침묵 속에 펼쳐지는 검은 군무, 괴이한 리듬의 출렁거림은 이들이 갖는 기이한 동질성을 표현한다. <마더>의 조용한 농촌 마을은 바보, 치매노인, 기초생활수급자, ‘쌀떡소녀’, 부랑자로 구성되어있다. 이 세계에서 그들은, 사법적으로야 피의자와 피해자로 나뉠지라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이상한 공모와 유대 관계로 얽혀있다. 혜자는 이미  비 속에서 리어카 끄는 고물상 노인을 도와준 적이 있다. 비 속에서 혜자가 고물 우산을 주워들고 이천원을 내밀고, 노인은 이중 천원만을 뽑아가지는 장면은 물론 이후에 벌어질 살인극을 전혀 예상하지 않는다. 혜자는 또 사진관에서 아정의 사진을 인화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아정의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독백한다. 살해당한 아정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가출한 상태에서, 치매걸린 할머니를 보호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몸을 판다. 아정에게 쌀을 주고 성을 구매한, 그래서 아정의 살인자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노인은 리어카를 끌며, 빈궁한 삶을 살아가는 독거노인이다. 그러나 남성들 간의 화폐를 통한 성적 쾌락의 구매 외에는 이들 사이에 어떠한 형태의 연대도 없다. 도저한 절망이다.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첫 장면에서, 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빛 갈대밭에서 홀로 혜자가 ‘아줌마춤’을 출 때에 짓는 괴이한 표정은 바로 이러한 절망의 표현이다. 그 절망의 표정은 우리를 보는 듯, 아닌 듯 모호한 응시를 던진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담겨지는 응시의 의미와 균열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시점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첫 장면에서와 달리 마지막 장면에서 혜자는, 아예 눈을 감고 일체의 응시를 중단하며 관광버스 안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첫 장면에서 그녀는 우리를 바라보며 홀로 춤을 추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응시를 멈추고 눈을 감은 채로 고속버스로 들어가 다른 ‘엄마들’과 함께 섞인다. 번져가는 석양 아래 버스는 점점 빨라지고, 음악은 고조되고, 혜자의 춤도 함께 조금씩 격렬해진다. 그리고 음악은 갑자기 사라지고, 춤을 추는 혜자의 거친 숨소리만 화면 위로 가득할 때, 광적으로 요동치는 화면은 일순간에 암전된다. 이 응시와 맹목, 단독성과 익명성, 독무와 군무의 대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 장면과 달리 마지막 장면에서 혜자는 허벅지에 홧병을 가라앉히고 끔찍한 일을 잊도록 해주는 침을 놓고 난 후에, 그저 춤을 출 뿐이다. 침놓는 행위는 한편으로 억눌린 성욕을 다스리는 금욕의 결단을 상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식의 정지, 망각, 또는 죽음을 의미하게 된다. 어쩌면 오이디푸스왕처럼, 혜자는 이 침을 허벅지가 아닌 눈에 꽂아서 자신의 눈을 멀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준과 혜자는 망각으로 자신들의 무서운 폭력에 침묵하고 공모한다. 이는 면죄될 수 있는가?

 혜자는 누명을 쓰고 들어온 종팔에게 “엄마없니?”라고 묻고, 종팔에게 “울지마라”고 말할 뿐이다. 반면 엄마있는 도준은 살인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살인 혐의를 면죄받았다. 그런데 엄마도 없는 기도원의 종팔이는 누가 구하는가? 혜자의 해결은 단지 혜자의 욕망이자 공동체 전체의 욕망이 반영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해결은 처벌과 단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용의자들의 집단인 공동체 전체를 떠다니는 죄의식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나머지 사람들을 그 죄의식으로부터 방면시켜 안도하게끔 하는 해결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란듯이 온 마을의 중심에 널려있는 주검의 강렬한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서 이런 식의 해결이 과연 옳은 것이냐고 질문한다. 또는 이 주검은 유령처럼 돌아와 자신의 살인에 얽힌 상징적 부채의 청산을 요청하고 있다. 아정의 시체가 온 마을에서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까닭은, 진태의 말처럼 살인범의 과시로 읽힐 수도 있고, 도준의 말처럼 피흘리고 있으니 누구든 와서 이 아이를 도와달라는 구조 요청으로 읽힐 수도 있다. 으슥한 골목 아무도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죽고, 온 마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지붕 위에 긴 머리를 아래로 깐 채로 널려있는 시체의 이미지. 모두가 폭력의 결과를 볼 수 있지만 정작 범인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히 살인은 벌어졌는데 엄마없는 누군가는 누명을 쓰고 있다. 그야말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10) 너무나 거대하고도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폭력들은 오늘날 하나의 스펙타클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폭력을 볼 수 있지만 그만큼 모두가 이에 둔감하다. 이제 나만 아니면 누구든 나의 죄를 떠맡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철없는 아들들의 끝없는 수건돌리기 놀이를 끝내고, 그 놀이를 발생시켰을 우리의 무의식, 우리의 욕망의 기저로 다가서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귀신과도 같은 아정의 시체는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애도해야 할 일종의 좌우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각주

1 그녀는 미선에게도 어서 임신을 권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없는 <마더>의 세계에서 어머니 되기는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관객 모두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2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이론과 임상분석』,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pp. 192~193.
   “아버지의 상징적인 기능을 전복시키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는 것, 그 결과는 아버지의 기능 자체보다도 더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신병의 발병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이냐, 더 나쁜 것이냐 ~ou pire>라는 제목으로 실행한 세미나 XIX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이다. 물론 그 제목에서 생략된 단어는 바로 아버지란 뜻의 père이다.”  
3 물론 이러한 주장이 <마더>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4 “어떻게 속지 않는 자가 오류를 범하는가?”는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 김소연, 유재희 옮김, 시각과 언어, 1995의 4장 제목인데, 이는 원래 라캉의 말,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les non-dupes errent)에서 유래한다. 이때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주어진 상징적 질서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것, 어찌 보면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같은 책 p. 162.
5 실수로 혜자가 흘린 물은 자고 있는 진태의 몸에 닿으려고 한다. 만약 이 실수로 진태가 깨어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잔인한 침묵이 한참 흐르고, 결국 혜자는 사건의 단서가 될 골프채를 조심스레 쥐고 탈출에 성공하고, 관객들은 한껏 조였던 긴장감을 함께 내려놓는다
6 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의 제3장 참조.
7 그는 혜자를 엄마라고 부른다. 물론 형사를 비롯한 마을의 많은 젊은 남자들이 혜자를 엄마라고 부르는데, 진태는 특히 성적인 뉘앙스를 짙게 풍긴다. 예컨대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등의 대사를 보라.
8 이는 신경증 내에서 강박증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히스테리를 가리킨다. 대개 남성과 관련되는 강박증적 성격이 불가능한 욕망에 대한 태도, 행동의 끊임없는 유예, 자신에 대한 비난과 관련된다면, 대개 여성과 관련되는 히스테리적 성격은 만족되지 않는 욕망에 대한 태도, 타자의 욕망에 대한 질문, 타자에 대한 비난과 관련된다. 여기서 내가 위 대목에서 취하는 히스테리의 의미는 본래의 정신분석적 맥락과는 다르게, ‘타자에 대한 비난’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히스테리적 주체는 사태의 모든 잘못을 외부로 돌리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9 물론 영화 속에서 사과를 물리고 난 뒤의 세팍타크로의 발차기와 이를 고발하는 전단지가 보여주는 것처럼, 고문은 세련화된 형태로나마 분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이 80년대나 오늘날이나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 주장할 알리바이를 주는 것은 아니다.
10 이성복, 「그날」, 『숨길 수 없는 노래』, 미래사, 1991,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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