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친 뒤 박수갈채가 쏟아질 때 김연아는 끝내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정작 그는  “나도 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 못 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긴장감과,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결코 같지 않다. 단 한 번의 점프 실수로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움을 끝내 극복해낸 뒤 비로소 숨겨뒀던 중압감을 훌훌 털어낸 ‘해방감’. 그것이 김연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대인배’ 김연아에게조차 어깨를 짓눌러 온 기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김연아뿐만 아니라 많은 선수의 기대하지 않았던 선전에 더욱 흥이 났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젊은 선수들이 과거와 달리 승리에 집착하기보다는 운동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더욱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들 한다. 게다가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에 대한 관심과 격려도 늘었으니 우리의 스포츠 관전문화도 그만큼 성숙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자각과 따뜻한 격려가 언제까지 지속될까라는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형 스포츠 행사가 열릴 때마다 나오는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 촉구나 스포츠 저변 확대 필요성의 역설과 같은 자성의 목소리 또한 이제는 통과의례처럼 익숙한 패턴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2년 월드컵 이후 ‘K리그에서 다시 만나자’던 외침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고 올림픽 때마다 혹은 올림픽 때만 뜨거워지는 핸드볼 사랑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제는 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또 어디에서 얼마나 많은 선수rk 짧은 환호를 뒤로하고 금세 잊혀질까.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선전에 세계가 놀랐지만 메달 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네덜란드의 오리에 코치는 “한국 선수들은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만 (한국 빙상계에)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선수들만 특출날 뿐이다”며 한국의 엷은 저변을 꼬집었다.

이왕 ‘즐기는 스포츠’에 관심을 두게 됐으니 이제 우리도 좀 더 여유를 갖고 스포츠를 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국내언론은 일본의 저조한 올림픽 성적에 대해 “한국은 병역면제 같은 특혜가 있어 선수들에게 충분한 동기 부여가 가능하지만 일본에서 스포츠는 그저 즐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크기 때문에 선수들이 최고가 돼야 한다는 의지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우리는 이런 분석을 자랑스러워 해야 할까? 병역면제를 위해 뛰는 선수가 과연 스포츠를 즐기는 선수보다 나은 것일까? 앞으로 나올 제2, 제3의 김연아들은 부디 해방감의 눈물 대신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병조 간사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