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후에 대한 발칙한 상상이 만들어낸 문제작

 

극은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는 칼날을 닮았다. 성욕과 욕설, 주림과 상실이 난무하는 이 공연은 어딜 붙잡아도 상처가 날 것 같은 형태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총연극회가 준비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낙원의 따뜻한 빛줄기가 아니다. 데일 것 같은 인간의 뜨거운 욕망과 디스토피아(dystopia)의 한기. 공연은 그 둘의 온도차 만큼 단단히 벼려져 있다.

막이 오르면 여자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남자가 표지판에 쓰인 ‘유토피아23. 생존한 자들이여 마지막 안전지대로 오라’는 문구의 의미를 묻자 전시장은 세상의 마지막 풍경과 오버랩 된다. 폐허 속에선 둘씩 짝지어진 사람들이 오직 세상에 단 둘만 남아있다는 불안과 싸우며 유토피아를 찾아 움직인다.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눈 먼 동생과 언니, 사형수를 교화하려는 신부(神父), 자식을 잃어 미쳐버린 아내와 남편 등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최후의 생존자들이 감춰 놓은 감정과 사연이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을 사로잡는 힘은 유기적 연결이다. 온갖 사연을 깡그리 그러모으는 것은 자칫하면 따로 놀기 십상. 그러나 극은 단락의 시작과 끝 대사를  교묘하게 엮어 장면을 잘 바느질해냈다. 다른 생존자들의 존재에 회의적인 아버지와 딸 간의 마지막 대화가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로 끝나자마자 여인과 다투던 소년이 “X 된 거지”라고 맞받아친다. 이렇게 장면의 조각들은 언어라는 굵은 실로 시종 묶여있다.


폐허 속에서 자신을 잃고 욕망을 발견하던 사람들이 극의 막바지에서  모두 만난다. 찔리기 직전. 극은 관객들을 겨눈 칼을 한 치 앞에서 거둔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에게 여자는 “표지판에 쓰인 ‘유토피아 23’의 뜻은 알아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말의 Ou(not)-topos(Plac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창세기 2, 3장은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낙원에서 추방되는 과정을 그렸다. ‘유토피아 23’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낙원의 부재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질적 내면일까. 날 선 마무리가 마지막까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제 보이는가. 매끈하게 뽑힌 칼날에 비추어진 자신의 원초성이.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의 원제는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라고 한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관람이 이 연극 ‘유토피아23’에 있는 유일한 유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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