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뉴스위크 선정 100대 도서’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50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15위를 차지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대문호들의 이름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14위를 차지한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보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고전은 알아도 아프리카의 명작에 대해서는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문학 서가에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는 있어도 쁘라무디아의 『인간의 대지』는 없다.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세계’문학에 다가가 있는 것일까.


세계문학의 정의를 다시쓰자?

세계문학전집이라 하면 딱딱한 양장에 둘러싸인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등 ‘알만한 작가의 알만한 작품’을 떠올리던 시대가 막을 내릴 조짐이다. 천편일률적인 세계문학전집 목록들에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최근 1~2년 사이 세계문학전집 시장에는 변화가 뚜렷하다.

1959년 이후 첫 전성기를 맞은 세계문학전집이 한동안 단행본에 출판시장의 주도권을 뺏겼다가 요즘 들어 제2전성기를 맞고 있다. 민음사가 1998년부터 꾸준히 출간해온 세계문학전집이 세계문학 출판시장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그 성과가 지금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11년간 경쟁자 없이 독주한 민음사의 손미선 팀장은 “전집이 700만 부의 누적판매를 기록하며 목록 250권이 눈앞에 있다”고 밝혔다. 후발주자들도 만만치 않다. 지난 해 전집 첫 20권을 내놓은 문학동네를 비롯해 을유문화사, 문학과 지성사, 시공사, 들녘 등 쟁쟁한 출판사들의 장기 출판계획이 민음사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이렇게 봇물 터진 세계문학전집의 양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와 작품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다. 영·미·독·프·일·러 6개국에 쏠려 있던 작가와 작품 목록이 다양하게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과 스페인어권에 속하는 페루,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문학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을유세계문학전집’ 등에서 적지만 심심치 않게 다뤄져왔고 향후 출간목록에도 꾸준히 추가될 예정이다. 문학동네는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을 비롯해 그리스, 이탈리아 등 생소한 유럽문학의 초역에 힘을 쏟고 있다. 창작과비평사는 ‘언어권별 단편선집’이라는 참신한 시도로 지난 1월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한 폴란드 문학을 소개했다.

그럼에도 세계문학의 넓어진 시야가 채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 중국,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문학 출간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출신 지역에서 인정받거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문학이라도 소위 ‘제3세계’라 불리는 나라의 작품들은 출판시장에서까지 외면당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손 팀장은 “영미·유럽권에 훌륭한 한국문학작품이 잘 소개되고 있지 않는 현실과 유사한 맥락이다”며 정치·경제적 약소국을 문화적 약소국으로 치부하는 편견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열린책들의 이소영 편집장 역시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이 지역에도 문학적 가치가 있는 보석 같은 작품들이 많다는 것은 대부분의 출판사도 인정한다”고 밝혔다. 적어도 소개할만한 문학작품이 ‘없어서’ 출간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소영 편집장은 “한국인은 ‘세계문학=서구문학’이라는 문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지금까지 당연시 해온 세계문학의 범주에 대한 문제제기다.


세계문학의 숨겨진 보물찾기

‘제3세계’의 문학을 이야기 할 때 그들의 역사적 상처를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 19세기 열강 침입으로 식민 통치를 겪거나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들이기에 ‘탈식민’과 ‘전쟁’의 모티브는 그들 문학의 숨길 수 없는 뿌리다. 문학평론가 왕은철 교수(전북대 영어영문학과)는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을 생각하기 어려운 만큼 식민통치나 분쟁 현실을 다룬 작품이 이들 문학의 주류를 이룬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문학들이 상처의 깊이에만 매몰되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자국 사회의 모순도 다루거나 나아가 인류 보편적인 문제까지 제기하며 가지를 뻗어 나간다는 것이다. 영국의 침입으로 아프리카 원주민 마을이 몰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풍요로운 전통문화의 이면에 자리한 여성 억압을 드러낸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경우 베트남 전쟁이라는 구체적 사건에서 출발해 인류가 가장 증오해야 할 대상인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뻗어나가는 수작이다. 분쟁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배경인 종교 간 알력 다툼, 왕족의 부패한 문화를 놓치지 않는 중동 문학들도 적지 않다. 조규형 교수(고려대 영어영문학과)는 “우리나라도 식민통치와 분쟁이라는 역사적 상처를 갖고 있으므로 이들 문학에 느낄 수 있는 공감이 적지 않다”며 “나라마다 차별화된 소재와 방식으로 각기 다른 감동을 준다”고 평했다. 

최근에는 역사·사회 문제는 물론 일상적이고 무겁지 않은 소재도 선호하면서 지역적 특성에서 탈피한 작가들도 두드러진다. 왕 교수는 “최근 신선한 주제와 실험적 형식을 시도하는 작가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남아공의 존 쿳시가 관심을 끌고 있다”고 말했다. 존 쿳시의 『슬로우 맨』은 ‘노년과 사랑’이란 주제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지면을 3등분한 이색 형식으로 독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아랍 문학도 더 이상 화약 냄새만 풍기지는 않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집트의 나깁 마흐푸즈는 가족과 관련된 일상적 이야기, 팔레스타인의 살와 바르크는 가부장 사회 여성들의 이야기를 독특한 감각으로 형상화했다.     


‘진짜’ 세계문학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

세계문학의 홍수에도 제3세계 문학이 제 빛을 밝히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은 무엇일까. 출판계에서는 한 목소리로 제3세계의 작가와 작품을 소개받는 ‘루트’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을유문화사 김영준 편집장은 “동남아, 아랍권의 경우 작가를 발굴하려 해도 관련 전공자가 극히 드물어 매번 난관에 부딪힌다”며 출판사의 고충을 털어놨다. 열린책들 이소영 편집장 역시 “각 나라에서는 국민 작가로 통하더라도 출판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으면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고 밝혔다.

가까스로 제3세계 문학에 접근한 후에도 출간의 장벽이 존재한다.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더라도 이를 번역할 마땅한 국내 번역자가 드문 것이다. 그나마 아프리카 문학이 유명 작가 위주로라도 출간돼 상황이 다소 나은 것도 이 작가들이 영어로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영미·유럽에 소개된 작품들을 중역하는 방식도 언어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에 왕은철 교수는 “아프리카 문학이라도 토착어로 쓰인 문학들과 동남아, 몽골, 중0.동 문학의 대부분은 사장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나 접근, 번역 문제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은 제3세계 문학을 소개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이다. 이소영 편집장은 “프랑스에서 100 만부 팔린 작품이라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100만부가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며 “가치있는 작품이라고 판단되면 마땅히 그것을 소개하는 것이 출판계 종사자들의 몫이지 일부에서 제기하는 수익성 문제는 논할 바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범우사 김영석 편집장도 “해외 문학을 한국출판사에 소개하는 다리인 출판 에이전시와 전공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더 적극적으로 제3세계 문학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출판계는 에이전시 등에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접근 경로를 개척하고, 번역가 및 전공자들도 이에 열의를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반 독자들이 아프리카, 동남아, 중동 지역 문학의 감동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 지역들의 문화와 역사 자체를 알려 ‘생소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재원 교수(한국외대 아랍어과)는 AALA(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해 점점 활동범위가 넓어지는 제3세계 문학 교류단체와 포럼 등을 언급하며 제3세계 문학의 미래가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제3세계 문학’ 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이고는 한편으로 그들의 문학을 또 하나의 범주안에 가둬 서열화, 타자화하는 문제점이 있다. 김 교수도 “아직까지 뚜렷한 대안 용어가 없어 정치 이데올로기가 함축된 이 용어가 문학계에서 쓰이고는 있다”며 “문학과 언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대륙보다는 언어권별로 구분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고 덧붙였다. 세계문학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제3세계’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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