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내다봐야 할 교육이
이윤과 권력추구에 이용돼
사회의 질적 향상 위해
품격 있는 교육 지향해야

김월회 교수
중어중문학과
인문학이 범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래론 그늘진 곳으로 찾아가는 인문학 강좌에서 위로는 기업의 최고경영진이나 고위 관료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이 전 방위적으로 약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필자가 인문학자임에도 반가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연전에 인문학 위기 운운할 때도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인문학이 각광받는 현 상황도 반기기만 할 현상은 아닌 듯하다. 도리어 인문학의 존폐가 걸린 ‘진짜’ 위기가 본격화되지 않았나 싶다. 인문학이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기보다는, 근자에 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즉물적’이고도 ‘속물적’인 욕망에 편승 됐다는 인상 때문이다.

세인들의 관심이 수형인이나 노숙자와 접속하는 인문학보다는 기업경영이나 입신출세에 이바지하는 인문학에 더 몰리는 까닭도 이 때문이리라. 인문학을 승인해준 근거가 인문학적 가치에서 비롯되지 않았기에, 이런 현상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역설이 발생한다. 인문학을 삶의 현장으로 소환한 욕망이 오랫동안 환금성(換金性)이 적다는 이유로 인문학을 멀리해오던 당사자였다는 점이다. 그런 욕망에 의해 인문학이 무한하고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고 승인되는 역설! 문제는 이러한 역설이 인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최근 부쩍 언급빈도가 높아진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우린 예로부터 ‘백년지대계’라는 말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다. 환갑이 중시됐던 시절 잘해야 예순을 간신히 넘겼던 이들이 100년을 사유의 단위로 삼았을 정도로 교육에는 세대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발현되는 그것만의 가치와 지향이 담겨 있다. 교육은 그 자체의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교육의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확고한 다짐이었다. 그랬을 때 한 개인이나 세대에 교차하는 제반 이해관계를 넘어서 교육에 떳떳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어떠한가? 어떤 이는 교육으로 사업을 하며 이윤을 좇고 있고 어떤 이는 교육으로 권력을 탐하기도 한다. 대놓고 교육을 정치에 이용하는 이도 있다. 웃지 못할 희극마저 벌어진다. 그들의 입에서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곧잘 나온다. 역시 말과 사물의 질서를 교란하는 달인들다웠다. 오랜 세월 ‘교육은 백 년을 내다봐야 하는 큰 헤아림’이란 뜻으로 쓰인 말을 일순간에 ‘교육은 대를 거듭하여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는 뜻으로 갈아치웠다. 익히 예견된 현상이었다. 교육이 자본주의의 포식대상이 되었을 때, 대학 총장이란 자리가 정계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을 때, 이미 그 조짐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선진국으로의 진입 여부에 따라 우리 삶의 조건과 양상은 사뭇 달라진다. 우리가 ‘경제규모 세계 10위권―1인당 GNP 2만불’에 근접했다해서 바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개인과 사회의 고양된 정신, 조화로운 능력 등이 그러한 경제력과 결부돼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격조 높고’, ‘품격 있는’ 교육이 요청된다. 곧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우리는 격조 높고 품격 있는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따져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시점이다.

이제 지자체 선거가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 각 지역의 교육감 선거도 함께 치러진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이다”는 선언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교육의 자율성과 독립성 구현에 성큼 다가설 수 있는 그래서 ‘품격 있는’ 교육을 다시 세울 좋은 계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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