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河) 4대강의 비극은
'모두'의 비극 아닌 '나'의 비극
무책임한 방관의 자세 버리고
4대강 지킬 협력체계 마련해야

부편집장
마을 공유 초지(草地)에서 주민들이 사이좋게 양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양을 더 들여와 공유지에 풀어놓았다. 양떼가 늘면서 그의 재산도 점점 불어났다. 이를 본 이웃 주민들이 너도나도 공유지에 양을 더 방목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양떼는 초지를 황무지로 만들었고 결국 양떼는 모두 굶어 죽었다.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 ‘공유지의 비극’ 이론을 발표하며 제시한 이야기다.

새벽 3시, 한 주택가에서 27세 여성 제노비스는 괴한의 칼을 맞는다. 비명소리에 이웃집들의 불이 켜졌다. “그 여자를 놔줘!”라는 소리에 달아났던 괴한은 이웃집 불이 꺼지자 재차 그를 습격했다. 비명과 함께 다시 불이 켜졌다. 괴한은 다시 도망쳤다. 불이 꺼지자 괴한은 다시 제노비스를 난자했다. 그가 절명하기까지 35분 동안 38명이 사건을 목격했고, 아무도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1964년에 뉴욕의 한 주택가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제노비스 신드롬으로 불리는 ‘방관자 효과’의 결과라 분석한다.

결국 4대강이 파헤쳐지고 있다. 함안 일대가 침수된다 해도, 어민과 농민의 살길이 막힌다 해도, 식수가 발암 물질로 오염된다 해도, 결국 4대강은 파헤쳐지고 있다. 반면 4대강 만큼 현 정권이 강하게 추진 중인 세종시 수정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지금 분위기론 정부가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을 국회건 국민이건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이명박 정권의 옥동자인 4대강과 세종시의 운명이 이렇게 엇갈린 건 4대강이 공유하(河)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배출한 토건 세력이 22조원이라는 눈먼 돈을 좇아 4대강을 습격하는 동안 절대다수의 국민은 이를 방관하고 있다. 몇몇 언론이 강바닥이 뒤집히는 참상을 보도하고 있지만, 태안을 뒤덮었던 국민의 환경 사랑은 소생할 조짐이 전혀 안 보인다. ‘충청’의 세종시를 내세우는 충청도민들은 ‘충청의 강’인 금강에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도 별 동요가 없다.

반면 세종시는 시끄럽다. 주민들의 상경 투쟁은 물론이고 여권 내 권력투쟁까지 벌어져 말 그대로 투쟁 국면이다. 이는 세종시가 들어설 땅이 공유지가 아니며, 충청도민이 세종시 수정을 괄시한 방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권은 역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였던 충청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공유지의 비극과 제노비스 신드롬의 결론이다. 공유지를 걱정하기보다 시류에 편승해 양떼를 불린 주민들은 결국 모든 걸 잃었다. 국토의 젖줄을 걱정하기보다 4대강 개발 이익에 숟가락 하나라도 올리려는 국민들은 어떻게 될까? 제노비스가 잔인하게 살해된 그 밤길을 걸어다닐 사람은 서로 신고를 미룬 이웃들이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방관하는 동안 오염된 물은 누가 마시게 될까?

4대강이 공유하(河)라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유지의 비극적 결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다행히도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수상자인 오스트롬은 공유지의 비극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게임이론으로 입증했다. 전체 구성원은 어느 시점엔가 공유자원 손실을 인식하게 되고, 결국 이를 보전할 사회적 협력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스위스와 필리핀 등지에서 1,000년 이상 공통의 하천을 잘 관리해온 집단들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젠 방관의 자세를 버리고 4대강의 비극이 ‘모두’의 비극이 아닌 ‘나’의 비극임을 인식할 때다. 그리하여 공유하(河)의 비극을 막고 오스트롬의 이론이 옳음을 입증해야 한다. 더 많은 제노비스와 더 많은 양떼가 죽어나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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