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도에게 가난은
자발적이며 필연적인 것
담론으로 견디는 가난
부자병 환자보다는 나아

정기인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이제 서른이 된, 한 회사원 친구가 오랜 꿈이었던 문학 공부에의 열망 때문에 주위의 만류에도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나를 찾아왔다. 그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최근 문학 연구의 풍조나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본질 ‘따위’는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가난을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봤다.

사실 서른이 넘은 대학원생들끼리는우리는 ‘사람’ 노릇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우리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사람’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돈 드는)일을 해야할 터인데, 이를 못하니까 ‘사람’ 노릇을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우리’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 중에서 인문학을 뺀다면, 나머지 대부분은 요즘 밥은 어떻게 먹고 다니느냐가 주된 화제거리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인문학도는, 그것도 서른이 넘은 대학원생은 ‘어떻게 가난을 견디는가’라는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하다. 첫째, ‘우리’는 정말 ‘가난’한가? 둘째, 만약 우리가 처해있는 형편을 ‘가난’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는 ‘견뎌’야 할 종류의 상태인가? 2010년 한국의 1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50만 4,344원이라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인문학 대학원생들 중에는 이 최저생계비 언저리 정도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사실 저 최저생계비라도 꼬박꼬박 나온다면, 행복하겠다는 친구들도 있다. 이는 분명 서른 넘은 회사원인 친구가 보기에는 ‘가난’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견뎌야’ 할 상태인 것일까?

법정스님은 『무소유』에서 간디의 ‘내게 소유는 범죄처럼 생각된다’라는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도 소개된 ‘프리건족’ 또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현재 지구의 환경파괴와 불행한 삶을 초래한다고 보고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외부에서 살아가는 운동가 집단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내 행복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이를 방해할 뿐이라는 깨달음, 더 나아가 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위의 인문학도들은 이러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있다. 프리건족처럼 적극적으로, 법정스님처럼 종교적 깨달음까지 미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남보다 많은 ‘부’가 타인에게, 또 지구에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불필요한 소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 인문학도의 삶이라 생각한다. 특히 문학의 본질이,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를 매개로 한 ‘우리’의 복원이며, 한국문학의 핵심적 주제가 약자에 대한 이해와 연대였다고 한다면 문학도는 마땅히 가난과 친숙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사회의 비판적 지식인을 길러내고,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실험이 이루어졌던 장소인 대학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인문학이 더욱 외면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플루엔자』라는 책의 저자 올리버 제임스는 ‘부자병’을 풍요로울수록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현대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질병이라고 하며 이것이 전염병임을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기나긴 설명으로 ‘인문학도는 어떻게 가난을 견디는지’에 대해 나는 한 시간 가까이 그 친구에게 열변을 토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친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얻었을지도 모른다. 인문학도는 담론으로, 가난을 견딘다고. 그래도, ‘부자병’에 마비돼 삶을 견디어내는 사람보다는, 담론으로 삶을 건너보려 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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