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으로 망각된 황라열 사태
박진혁 사태도 닮은 꼴 반복
기록이 남아야 역사도 있는 법
후대에 남길 기록화 작업 절실해

“기록이 있어야 역사가 있다”와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종이를 낭비할 생각은 없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은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2006년 서울대에는 경력을 속인 총학생회장이 탄핵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탄핵을 전후한 4개월간 학교에는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학생들은 스누라이프와 총학생회 게시판이 터져나가도록 격하게 논쟁했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이며 소통은 또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을 파헤치는 질문들이 캠퍼스를 뒤덮었다. 

그런데 그 모든 복잡다단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바람에 날린 재처럼 깨끗이 소멸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토론회 한 번, 보고서 한 쪽 남지 않았다. 오직 개인들의 파편화된 기억만이 당시의 사태를 뿌옇게 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개봉’박두 2009년. 상식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에서 박진혁 사태는 황라열 사태와 유사했다. 그렇기에 2009년은 2006년을 기억해야 했다. 관악 학생사회가 황라열 사태를 체계적으로 기억했다면 작년의 선거 파행은 한결 나은 방식으로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런 총학생회장을 선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이 없으니 기억도 없다. 개별적인 기억들은 매년 구성원 사분의 일이 교체되는 학생사회의 조건을 버티지 못하고 졸업으로 군대로 흩어졌다. 학생사회의 기억은 구조적으로 망각된다. 

그런 현실을 딛고 2006년을 기억했던 사람이 한 명 있다. 박진혁이다. 그는 역사로부터 간명한 진리를 파악했다. “청문회는 방학까지 최대한 미루고, 다들 잊어버릴 때까지 기다리면 우왕 굳.” 그는 황라열의 실패를 기억했고, 기억한 만큼 진보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임기 끝나고 온갖 핵심적인 기록들을 트럭에 싣고 나왔다는 전두환과도 유사하다.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두 명을 고르라면 전두환과 박진혁을 꼽는다. 

 어쨌거나 지난 일은 지난 일. 투표함은 이미 뜯어졌고, 박진혁은 도망갔다. 학생사회가 박살 났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판국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사태를 남김없이 기록해 후대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누라이프 인기태그에 ‘박진혁 박징역’을 올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건일지를 작성하고, 사태와 관련해 생산된 모든 의미 있는 문서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다.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비평과 대자보들, 과반 커뮤니티와 개인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을 모으자. 조사위 보고서와 함께 조사위 활동일지를 작성해서 정리하자. 그리고 토론회를 열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이 사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논의하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자료집으로 만들자. 오프라인으로 배포하고, 총학 게시판과 스누라이프에도 업로드하자. 기록관에도 몇 부 기증하자. 

이 지겹고 피곤한 일들을 누가 할 것인가? 미안한 말이지만, 사태를 가장 잘 아는 연석회의와 학내 언론들이 해야 한다. 함께 할 자발적 아키비스트(기록관리사)를 모집해 보는 것도 좋겠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분명히 이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당신들이 모두 졸업하고 나서, 작년의 사태를 경험으로서 기억하는 이들이 더 이상 학교에 남아있지 않게 된 시점에서 이 기록들은 가치를 획득할 것이다. 역사가 다 그런 것 아닌가.  

그래, 미안하지만 첫 문장은 ‘뻥’이었다. “기록이 있어야 역사가 있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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