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 교수
사회학과
늦게 일어나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버스가 서는 정류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 후미진 곳을 지나다가, 거무스름한 물체가 길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어떤 고양이의 시체였다. 흑 회색 줄무늬가 아직도 선명한, 그러나 노쇠하고 지친 길 고양이의 시체였다. 무방비 상태로 늘어진 몸 주변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정황으로 추측해 보건대, 누군가에 의해서 이곳에 유기된 것이 아니라,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돼 저 스스로 여기에 쓰러진 듯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고양이의 죽은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었다. 이런 표현이 그렇지만, 고양이의 죽은 눈동자는 아직도 생명의 기운으로 생생하게 일렁거리는 듯 했고, 그 자체로 몹시 아름다웠다. 다른 생물체의 죽음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자신을 질책하면서 고양이가 누운 자리 쪽으로 한 걸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파문처럼 여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고양이의 목 주변에 환영처럼 일렁거렸다. 그것은 공포의 흔들림도 아니고, 기쁨이나 위안의 흔들림도 아니었다. 고양이는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죽어가는 몸을 다른 생물체의 시선으로부터 숨기는데 실패한 채 마지막 숨을, 마지막 한 번의 움직임을, 마지막의 어떤 표현을 시도했던 것이다.

일상의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에 예기치 않게 참석하게 된, 한 이름 모를 생물의 임종의 자리. 언제나 앞을 향해 폭주하던 내 생활의 육중한 기관차가 끔찍한 마찰음을 내면서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거기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죽음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엇을 위하여 너는 뛰어가느냐?’.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도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왜 뛰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무지가 나를 뛰어가게 하는 힘이다. 빛이 꺼져 검은 블랙홀로 변한 길 고양이의 텅 빈 망막에 내 마음의 수많은 형상들이 일어났다 스러져갔다. 죽은 고양이의 자리에 사람들의 모습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랑하게 될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누웠다. 삼라만상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죽은 고양이의 자리에 누워 있었다. 급기야 거기에 나 자신이 누워 있었다. 그 자리는 우리 모두의 자리, 셰익스피어를 빌려
말하자면, 자연에 죽음을 빚지고 있는 유한한 목숨을 지닌 우리 모두의 공통의 자리였다.

어찌 보면, 우리는 공평하게 언젠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짧은 삶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그리고 죽음 이후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위안하기 위하여 사회를 이루고 사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성찰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에둘러 갈 수 없는 필수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아마도, 오직 유한성에 대한 고도의 자각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필요한 나침반으로 기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