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참석과 대학 간 교류를 위해 일본을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경험한 버스와 택시는 안전한 운행 속에서도 거의 제한된 최대속도로 운행했다. 좁은 골목길과 만나는 교차로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지만 사고가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법규의 준수와 남을 배려하는 사회 시스템에 거의 예외가 없다. 사 년 전 벨기에에서 개최된 학회에 참석하면서 승용차를 빌려 독일의 고속도로를 운전한 적이 있다. 제한속도가 없는 고속도로에서 내 생에 처음으로 시속 220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교통법규의 준수와 서로의 배려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출근길 관악구청에서 교내에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탈라치면 그 짧은 구간에서 정차위반, 차선위반, 건널목 정지신호위반, 끼어들기 등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다. 내 시간이 조금 절약됐는지 모르겠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다. 대중교통의 이러한 행태는 특정 운전자에 국한된 것 같지는 않다. 과연 누구를 위한 배려인가? 그렇다고 운전기사에게 제발 안전운행해 달라고 나부터라도 말하기 어렵다.
서로 잘 아는 관계 속에서 배려하고 지적해 주는 일은 보다 쉬운 것 같다. 최근 내 강의 첫 시간에 교과목에 대한 소개를 하고 수강생들이 각자 자신을 소개하게 한 후 다과 혹은 간단한 맥주파티를 해보니 효과 만점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랫집 사람이 동문임을 서로 확인한 후 층간소음에 더 주의하게 되는 나 자신을 알고 쑥스럽다. 2002월드컵 응원 때 국민 모두 ‘우리’가 돼 시청 앞에서 쓰레기를 치웠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최근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수월성을 강조하는 소위 무한경쟁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소중하니까’ 혹은 ‘우리는 소중하니까’라는 생각으로 내가 아닌 그리고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편의와 효율을 늘 차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특히 우리 서울대인은 알게 모르게 늘 수월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도록 요구받고 있다. 더욱 솔선해 남을 배려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일깨워 고쳐나가는 참여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느낀다.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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