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천재: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

“신이시여 왜 저에겐 갈망만 심어주시곤 재능은 주지 않으십니까.”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평생 시기한 동시대 작곡가 살리에리는 이렇게 절규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전기에서 천재들은 신화적 존재다. 천재들을 볼 때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그들을 때때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음악 미학의 선도적 사상가인 피터 키비는 『천재: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에서 미학, 철학 분야의 이론과 지식체계를 아우르며 이처럼 신화화된 천재들의 비밀을 파헤쳤다.

저자는 고대 플라톤과 롱기누스의 예술론으로부터 천재를 두 유형으로 분리한다. 플라톤이 ‘시란 기술이 아닌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단서로 저자는 플라톤적 천재를 추출한다. 무아지경 상태에서 창작하는 플라톤적 천재는 신에게 ‘사로잡힌’ 천재들이다. 그러나 천재성을 규칙파괴와 동일시한 롱기누스의 사상에서 저자는 플라톤적 천재와 상반된 천재상을 발견한다. 롱기누스적 천재는 신의 대리인이라기보다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신을 ‘사로잡는’ 천재다. 그들은 기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과감히 파괴하므로 플라톤적 천재보다 능동적이다. 대표적 롱기누스적 천재인 베토벤은 작곡할 때 기존의 화성법을 어기기 일쑤였다. 그는 창조를 위해 실수를 일부러 ‘허용’할 만큼 신의 경지에 다가간 천재로 군림했던 것이다.

저자는 천재론의 시대적 변화를 진자의 운동에 비유한다. 진자의 축은 플라톤적 천재와 롱기누스적 천재의 양극단을 오갔다. 최초의 음악천재 헨델이 롱기누스적 천재였다면 19세기 초 모차르트는 플라톤적 천재였고, 비슷한 시기 베토벤의 등장은 롱기누스적 천재의 부활이었다. 최근 진자의 축은 플라톤적 천재 쪽으로 다시 이동 중이다. 영화 『아마데우스』가 보여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차르트가 천재담론의 중심이 되면서부터다. 영화에서 “결혼이 어려운 것이지 음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모차르트를 보면 천재에게는 ‘1%의 영감과 99% 노력’이 아닌 ‘100%의 영감’만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롱기누스적 천재에 더 주목한다. 귀머거리가 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규칙을 과감히 파괴한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 음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숭고함과 장엄함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천재론을 옹호하며 진자운동을 방해하는 공기저항과 같은 천재론 해체 시도에 맞선다. ‘일벌레 천재론’은 천재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함께 천재론 해체를 시도한다. ‘일벌레 천재’의 조건은 타고난 ‘영감’ 혹은 ‘재능’보다 ‘비범한 집중력’ 하나로 환원된다. 일주일에 한곡씩 꾸준히 작곡을 했던 바흐가 대표적이다. 비범한 집중력에 창작을 향한 야망이 결합되면서 그 역시 음악천재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일벌레 천재’보다는 신에게 사로잡힌, 혹은 신을 사로잡은 천재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저자는 범접 불가능한 천재성의 근원을 단지 비범한 집중력에서만 찾는다면 우리가 천재들이 만든 작품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이나 신비로움 같은 감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반문한다.

천재는 외계인이나 신에게 ‘사로잡힌’ 영매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다. 때로 신을 ‘사로잡는’ 그들은 단지 재능의 정도가 우리의 그것과 다를 뿐이다. 『천재: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는 신화화된 천재의 비밀을 파헤쳐 지상에 내려놓았지만 그들의 천재성은 여전히 신의 영역이다. 천재론의 진자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천재: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
피터 키비 지음┃이화신 옮김┃썸앤파커스┃432쪽┃1만8천원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