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식량•에너지•환경 등 인류의 미래가 당면한 문제를 두고 과학계가 섭외한 ‘따끈따끈’한 해결사 ‘육종’.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육종은 ‘오래된 미래’다. 넓은 의미의 육종은 더 나은 품종을 얻으려는 인류의 모든 시도를 포함한다. 따라서 육종의 기원은 농경이 시작된 1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먹을 수 있는 곡물만 선별적으로 경작하던 원시인의 노력도 따지고 보면 육종의 일종인 셈이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의 작물을 인간이 원하는 형질을 갖도록 개량하는 좁은 의미의 육종은 언제부터 본격화됐을까. 답은 1900년대 초 멘델이 완두콩 교배 실험을 통해 발견한 유전법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그전까지 경험이나 직감에 의존해 이뤄지던 육종 원리를 규명해낸 획기적 성과였다. 멘델 사후 유전법칙이 수정•보완되며 정착한 유전학은 원시적 육종을 발전시켜 과학적 품종개량을 가능케 했다.

녹색혁명의 주역,
태생적 한계로 좌절

이 시기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해 최근까지 유행한 육종이 ‘전통육종’이다. 이 중 95%를 차지하는 교잡 육종은 ‘잡종강세’ 원리를 이용한 육종 방식이다. 서로 다른 형질의 개체를 인공적으로 교배하면 부모 세대와 성격이 다른 여러 자손이 만들어진다. 이 중 일부는 단일 품종인 부모 세대보다 강하고 수확량이나 크기면에서 뛰어난데 이것이 잡종강세의 원리다. 육종가(育種家)는 이 교잡 과정을 반복해 필요한 형질을 가진 새 품종을 만든다. 

전통 육종의 역사는 100년에 불과하지만 그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전 대륙에 걸쳐 인류의 주식을 담당해 온 옥수수•밀•보리 등이 집중적으로 육종됐고 이 과정에서 획기적으로 향상된 생산성은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켰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급속한 식량 증산과 이를 기반으로 달성한 식량 자급은 ‘녹색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통 육종은 태생적 한계로 정체기를 맞는다. 강병철 교수(식물생산과학부)는 “육종가의 직관과 경험에 의존하는 전통 육종은 애초부터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유전자의 특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형’은 재배 환경이 열악하면 잘 나타나지 않는데 이럴 경우 육안으로는 정확히 선별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교배•선별과정을 거치며 육종 기간이 길어지는 것도 문제다. 일년생 작물은 육종하는 데 10~15년 정도가 소요되며 다년생 작물은 이보다 5년 정도 더 걸려 관련 기관의 허가까지 20년 이상이 걸린다. 

이종 교배가 가능한 작물의 수가 한정된 것도 전통 육종의 한계다. 많은 작물이 이미 육종 실험을 거친 상황에서 신품종을 생산할 ‘밑천’이 불가피하게 고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용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다른 종과 교잡이 되지 않을 경우엔 육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어려움을 두고 최양도 교수(농생명공학부)는 “전통 육종의 성장이 점점 둔화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의 식량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명공학 접목으로
정확성과 효율성 높여

여기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생명공학이다. 전통 육종의 비효율을 극복한 생명공학은 더 나아가 전통 육종에서 불가능했던 품종 개량도 가능하게 한다. 육종기간을 앞당긴 일등 공신은 ‘분자표지’ 기술로, 이는 DNA 염기서열을 분석해 각 개체의 형질을 탐지하는 기술이다. 따라서 전통 육종 방식에서는 유전자 특성의 표현형이 나타날 때까지 종자를 재배해야 하지만 분자표지 기술을 이용한 육종방식에서는 재배기간 없이 종자에서 추출한 DNA를 보고 유용한 개체를 바로 골라낼 수 있다.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또 다른 생명공학기술인 유전자변형기술은 전통 육종의 경계를 넘어 품종개량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전자변형생물체(Genetically Modified Organism,GMO)’로 대중에게도 익숙한 유전자변형기술은 교배가 불가능한 생물로부터 분리한 유용유전자를 다른 생물에 이식해 새 품종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한정된 유전자원의 활용 범위가 무한대로 늘어나 다양하고 우수한 품종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유전자변형기술을 이용한 육종 과정은 발굴-재조합-이식-배양의 네 단계를 거친다. 먼저 기존의 작물에서 필요한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발굴한다. 발굴된 유전자는 이식된 식물체에서 그 형질의 특성이 잘 발현되도록 재조합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이용되는 것이 박테리아의 ‘플라스미드 DNA’다. 플라스미드는 세포의 생존과 관계없는 독자적 부위이므로 이 부분을 끊어내고 그 자리에 다른 유전자를 삽입할 수 있다. 이렇게 재조합된 DNA가 다른 개체에 이식되고 배양 과정을 거치면 새로운 품종이 탄생하는 것이다.

유전자 이식 단계에서 활용되는 기술도 흥미롭다. 이 과정에는 작물의 종류에 따라 아그로박테리아나 금속입자총이 사용된다. 유전자 이식 세균인 아그로박테리아는 자연 상태에서 다른 식물에 병을 일으키며 자신의 유전자 일부를 삽입하는데, 이를 이용하면 특정한 영양소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콩과식물처럼 아그로박테리아의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는 입자총 방식을 이용한다. 재조합된 DNA를 미세한 금속에 코팅해 식물세포를 향해 쏘면 염색체 안에 삽입된 DNA가 효과적으로 발현된다.

이렇게 전통 육종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은 오늘날의 육종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유전자재조합기술은 작물의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기존 작물에 부족한 영양소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데 이르면서 폭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업생명과학 응용을 위한 국제사업단(ISAAA)’ 측은 “2009년 기준으로 GMO 재배면적은 상업화가 시작된 96년보다  79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그러나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것 같은 육종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특히 GMO 식품의 안전성과 윤리적 문제에 대해선 부정적 여론이 우세하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여러 환경단체가 GMO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캠페인과 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으며, ‘지구의 벗’도 유럽을 중심으로 ‘GMO 프리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환경연합 등이 GMO 식품을 수입•유통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꾸준히 항의시위를 벌이며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소비자 단체들은 대체로 GMO에 대한 소비자의 알 권리와 선택할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소비자원 하정철 기술위원은 “한국의 GMO 표시제는 유럽에 비해 지나치게 느슨하다”며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만큼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소비자 주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소비자연맹 이향기 부회장은 “근거 없는 불안은 정부•소비자•산업계 모두에게 부정적이다”며 GMO 식품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관련 기관들의 적극적 소통을 강조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농촌진흥청 생물안전성과 서석철 과장은 “안전성이 검증된 GMO만 생산•유통한다”고 해명했다. 같은 기관의 이근표 연구사도 “범부서적으로 안전성 평가가 이뤄진다”며 GMO 평가의 객관성을 강조했다. 현재 GMO에 대한 안전성 평가는 인체안전성평가와 환경안전성평가로 나뉘며 각각 독성•알레르기성•영양성과 잡초성•유전자이동성•비표적 생물체 영향성이 평가된다. 그러나 평가를 시행하는 정부가 기본적으로 GMO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점에서 GMO의 안전성에 대한 시민 단체의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식량주권을 확보하고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육종이 도리어 개발도상국의 식량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멕시코의 경우 주식인 옥수수 종자의 가격을 다국적 종자기업인 카길과 몬산토가 좌우하면서 농촌은 물론 저소득층의 생계가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이에 대항해 일어난 ‘또르띠야 시위’는 ‘식량주권 확보, 임금보장, 고용안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멕시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2007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식량주권포럼 ‘닐레니(Nyeleni) 선언’은 식량 생산의 전통적 양식을 보호하려는 시민사회의 저항이다.

육종은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여러 변수와 우려에도 육종 과학자들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유토피아’에 대한 의혹과 도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식량 위기 가능성 앞에서 육종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절박함 때문이다. 한국 정부도 2009년 말 ‘종자산업 육성대책’을 발표해 육종기술지원센터 설립과 민영화, R&D 투자 강화 등 다양한 육종 지원책을 내놓았다. 따라서 이러한 지원책이 실질적으로 시행되는 2010년은 한국 육종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전망이다. 최양도 교수는 “육종은 결코 뒷걸음질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먼 과거에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육종이 앞으로도 인류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신념이 묻어나는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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