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 속 길 찾기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학부 1학년 때 춘천 위도로 갔던 엠티를 생각하며,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날도 호우주의보가 내렸고, 호우주의보라는 걸 체감하지 못했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우산 하나 달랑 챙겨서 국문과 84학번 엠티를 갔다. 예정된 1박 2일은 2박 3일이 되었고, 우리는 헬기를 타고 구조되었으며 춘천에 있는 미군 기지의 버스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을 대접 받았다. 서울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위도 주민들보다 먼저 구조를 받았고, 따뜻한 커피까지 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그 커피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커피와 함께 80년대 관악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므로.


길 위에 있지 않았더라면, '교문을 나서며'라는 공식적인(?) 청탁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사논문 인쇄를 맡기던 날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무도 없는 황야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관악의 교문을 나서는 것이 이번으로 세번째이다. 학부를 졸업할 때도 석사 졸업을 할 때도 관악을 떠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는 관악 교정과 함께 일상생활을 해 왔다. 아이를 서울대 어린이집에 맡기고, 강의를 해가며 5동 연구실에서 논문 준비를 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두 아이의 엄마인 내가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시간을 길게 잡는 수밖에 없었다. 장기전이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사이에 친정 어머니가 폐암으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투병기간 동안에도 어머니와 논문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고, 돌아가시고 나자 정말 손을 놓고 싶었다. 주변에서 그럴수록 논문을 써야 한다고 부추기는 바람에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뭔가에 미치고 싶었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한미(寒微)한 아줌마 연구자이다. 이제 한 '도(道)'를 깨쳤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줌마 연구자라는 자의식 때문에 괴로웠던 적도 많았다. 졸업과 함께 정말 관악을 나서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내 앞에는 길이 없다. 대학원 시절부터 박사논문에 이르기까지 일제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1920∼30년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그 길 때문은 아니었을까? 길이 어디로 휘어져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빗속에서처럼 길을 찾아가야 하는 부담이 식민지 지식인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평생을 서서 사는 것' 마냥 힘든 일일 것이다.

박진숙
국문학과·박사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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