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역사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상탄압이자 폭정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대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 등에서는 분서갱유가 무색할 만큼 혹독한 사상 탄압이 무수히 자행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책의 학살(libricide)’은 미개한 고대인의 전유물일까. 최근 출간된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는 분서갱유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교묘하게 진화돼 현대에 이르렀다고 폭로한다. 

문명사회에서 벌어진 현대판 분서갱유는 오랫동안 저자 레베카 크누스를 사로잡아왔다. 책과 도서관에 가해진 ‘범죄’를 연구한 끝에 그가 지목한 범인은 20세기 역사적 흐름을 주도한 이데올로기다. 저자는 첫 저서인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에서 역사학·정치학·심리학·문헌정보학 등을 넘나들며 인류를 위한 이념이 어떻게 인류 문명의 정수인 책을 말살하는지 밝혀낸다.

책의 학살이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지배층에 의해 끊임없이 자행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책의 이중적 성격이 궁극적으로 지배층 중심의 사회구조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1~2장에서 책은 집단이 가진 문화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피지배자를 계몽해 체제를 전복시키는 ‘기묘한 상품’이라 말한다. 따라서 책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며 콩도르세는 이러한 책들이 모인 도서관을 “아주 정치적인 전쟁터”라 표현했다.

여기서 책의 학살이 단순하고 충동적인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책과 도서관의 파괴는 집단의 사고능력을 거세해 정체성을 와해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나치 독일에서 학생들이 인디언 춤을 추고 주문을 외우며 책을 불태우는 모습은 광기어린 행동으로 보이지만 실은 히틀러 정부가 주도한 치밀한 전략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책의 학살은 중세를 거쳐 오랫동안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20세기 들어 빛바랜 종교의 바통을 이어받아 신의 자리를 꿰찬 것은 이데올로기다. 저자는 맹목적 신념인 이데올로기가 이성을 가장해 사회적 정당성을 이끌어낸다며 이 시기에 벌어진 책의 학살이 전보다 교묘하면서도 위험해졌다고 말한다. 나치 독일, 세르비아, 이라크, 중국, 티베트 다섯 국가의 사례가 차례로 제시되는데, 가장 최근인 1990년대까지 사상 탄압이 이뤄진 티베트에서 중국이 공산주의를 유입시키려고 불교 경전과 사원을 파괴하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된다.

저자는 이데올로기로 일어난 책의 학살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바로 인류동포주의와 휴머니즘, 다원주의를 기본으로 국제 사회에서 공감대를 찾고 이를 통해 인간에 내재한 파괴적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 이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데에는 조약 문서를 구성하는 활자들이 미약하게나마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유네스코 협약·제네바 협정 등의 국제조약을 마련하는 일이 그 실현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고대에 일어났던 책의 학살이 20세기에 이데올로기의 힘을 얻어 부활했듯 21세기에도 사상과 문화에 대한 위협은 계속된다. 이미 미국, 인도네시아, 이라크 등지에서 집단적인 도서관 파괴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군 당국은 지난 2008년 정신 전력 저해를 이유로 23종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반입을 금지한 바 있다. 현대판 분서갱유가 자행되는 요즘, 당연한 것으로 치부됐던 사상의 자유와 이를 담은 책의 가치를 돌아볼 때다.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레베카 크누스 지음┃강창래 옮김┃알마┃512쪽┃2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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