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엄격한 잣대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문화에 대한 접근
놀이와 문화를 대등한 위치에서 분석한 하위징아의 대표 저작

박정진 박사
한양대 겸임교수
우리는 흔히 ‘놀이’라고 하면 경박한 것으로 생각하고, ‘철학’이라고 하면 진지한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인간의 특징이 지혜에 있는가, 놀이에 있는가. 아니면 지혜도 놀이의 일부인가.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는 인류학과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이미 이름난 고전이다. 이번 번역본은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교적 담담하게 서술돼 일반 독자에게도 쉽게 읽힐 것 같다.

문화에 대한 놀이적 접근은 요한 하위징아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예술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모방설, 칸트의 유희본능설, 허드슨(W. H. Hudson)의 자기과시설 등이 있었지만 문화를 놀이로 보는 견해는 없었던 것 같다. 놀이는 예술보다 광의의 개념일 수 있다. 하위징아는 과학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인 방법을 취했다.

“동물들은 인간 사회가 놀이를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놀이를 해왔다.(29쪽)" 이 말은 놀이가 문화에 있어 ‘원(原)문화(proto-culture)’의 성격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그는 또 놀이에 비물질적 특성이 있음을 이렇게 말한다. “놀이는 생리적 현상, 심리적 반사 운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30쪽)” 놀이의 본질은 바로 재미(fun)이며 놀이는 하나의 총체적 현상인 만큼 그 총체성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인류학자가 문화를 총체성(wholism)으로 규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삶이나 문화를 놀이로 보는 것은 어쩌면 도덕적 엄격주의나 특정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벗어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더 자유롭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현명함을 일깨운다.

놀이의 특징은 그 자체의 룰(rule)이 있다는 점이다. 그 룰은 절대적인 것이다. 만약 룰이나 규칙을 깨는 자가 있으면 놀이를 망치게 된다. 이것은 정도나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문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화를 놀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합리성보다 어떤 초월성, 기쁨, 재미 등 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에 가깝고 자유가 끼어들 여지가 많다. “생활의 즉각적인 필요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그 행동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30쪽)”

문화가 마치 합리성의 산물인 양 ‘이성주의(理性主義) 문화론’이 판치는 마당에 그의 ‘놀이주의’는 되새겨볼 만하다. 놀이는 적어도 이성보다는 우주의 운동과 움직임, 감정, 초월, 교감 등 인간의 여러 다른 본성 혹은 본능과 만나는 계기가 된다. 하위징아는 서양의 주기론자(主氣論者)에 해당하리라. 다음 대목은 특히 중요하다.

“마음이 흘러들어와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놀이는 가능해지고,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다. 놀이의 존재는 인간적 상황의 초(超)논리적 특성을 끊임없이 확인해준다. 동물도 놀이하기 때문에 기계적 사물 이상이 될 수 있다.(중략) 이런 놀이의 비합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합리적 존재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34쪽)”

놀이의 원리는 경쟁과 재현이다. 경쟁은 경기와 투쟁의 방식을 택하게 한다. 결국 놀이와 경기, 투쟁은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확연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결국 강도의 문제가 된다. 놀이는 문화 전반에 걸쳐 있다. 그래서 의례, 축제, 종교, 철학, 과학에서조차도 놀이의 원리를 발견한다. 심지어 법률, 전쟁도 놀이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문화의 제일 밑바닥에 숨은 원리는 바로 놀이인 셈이다. 이를 놀이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철학적 놀이의 장본인들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도 실은 소피스트 중의 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철학 자체가 소피스트의 산물일 수도 있다. 철학의 언설이나 법정의 공방을 놀이로 보는 것은 삶을 더 자유분방하고 발랄하게 한다. 심지어 거짓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진리가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천적으로 놀이로서의 거짓말과 자유가 없다면 사람들은 옴짝달싹도 못할 것이다.

놀이는 자체가 바로 우주적 은유이고, 은유란 시의 핵심이다. “시, 음악, 놀이는 리듬과 하모니를 공통요소로 취한다. 하지만 시에서는 일부 시어(詩語)의 의미가 시를 순수한 놀이 밖으로 나오게 하며 관념화와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하는 반면 음악은 그 비구상성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중략) 모든 진정한 의례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이하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했다.(302쪽)” 하위징아가 조형예술의 물질성으로 인한 비(非) 놀이적 특징을 지적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것 같다.

하위징아는 네덜란드 출신의 언어학자이면서 역사학자이다. 『중세의 가을』(1919), 『에라스뮈스와 종교 개혁의 시대』(1924)가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대작이었다면, 『호모 루덴스』(1938)는 그의 언어학, 비교종교학, 역사학 등이 집대성된 종합적 해답이었다. 비인간적인 나치 치하에서도 놀이를 통해서 사람과 문화를 바라볼 줄 아는 여유와 아량을 가진 그였기에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놀이의 인간’을 통해 투명하고 초월적인 그를 느껴본다. 예술로서 문화를 바라보는 예술인류학을 주창한 필자는 놀이로서 문화를 바라보는 그에게서 시쳇말로 같은 과임을 느낀다. 만약 ‘예술=놀이’라면 둘의 교집합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일상의 놀이 가운데 좀 고상하며 품격이 있고 지속적인 것이 예술인가. 아니면 시대의 대표적 조형성을 얻으면 예술이라고 하는가.

하위징아의 말년의 저작이면서 가장 대표적인 이 책은 그를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그는 놀이를 다른 문화와 관련해 독립적인 위치에 놓음으로써 놀이를 중심으로 다른 문화를 배열하거나 비교분석해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박정진 박사

한양대 겸임교수
문화인류학 박사
『예술 인류학, 예술의 인류학』 (이담북스, 2009)

호모 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지음┃이종인 옮김┃연암서가┃448쪽┃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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