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아시아의 지식인
‘시장 vs 반(反)시장’의 윤리적 도그마로부터의 해방 주장
시장도 국가도 모두 같은 위상의 제도일 뿐
이제 장하준의 논리에 접근하기 위해 시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을 좌우로 나누는 기준은 시장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시장이란 것을 객관적인 실체(실재)로 볼 뿐 아니라 이에 윤리적 가치까지 덧씌우면 우파가 된다. 이에 따르면 시장은 자연질서이자 긍정적 윤리이고, 시장과 개인의 자유에 개입하는 국가는 ‘윤리적 악’으로 간주된다. 통화주의, 중앙은행의 중립성, 균형재정, 산업정책 반대 등 신자유주의 교리들은 경제성장 정책인 동시에 ‘정언명법’ 수준의 윤리이기도 하다. 좌파는 신자유주의 교리의 비윤리성을 따진다. 이런 논의 구도에서 시장과 국가(규제, 정치)는 대립물로 부상한다.
그런데 장하준의 시장 혹은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태도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결코 시장 편에 서서 국가를 비판하거나 혹은 ‘국가의 시장 찍어 누르기’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한 일은 ‘시장/국가의 대립 관계’라는 상식을 해체하는 것이다.
장하준은 시장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과 국가(정치) 간엔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어디까지가 시장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까지 산업국가들에서는 아동노동이 허용됐다. 어린이도 당당한 노동시장 참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초 현재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 아동노동은 범죄이다. 그러나 어떤 시장주의 경제학자도 어린이라는 다수의 인구를 노동시장에서 배제해 자본 측을 불리하게 만든, 포악한 국가 규제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하준은 시대에 따라 정치 상황에 따라 시장의 영역이 변화된다고 갈파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과 국가 간에 혹은 시장과 정치 간에 경계선을 설정하는 작업 자체가 ‘정치’의 영역이다”.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인 임금이나 이자율마저 현실 세계에서는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경제학이 주장하는 시장의 ‘개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장하준은 시장, 즉 무한하게 많은 공급자들과 수요자들이 무한하게 개방되거나 혹은 완전히 닫힌 정보체계 내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상품을 상호 교환하고 최적의 보상을 얻는 아름답고 완결적인 체계를 파괴해버린다. 이런 시장의 개념이 해체된다면, 시장과 분리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됐던 국가 혹은 정치는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공중분해된다. 이렇게 산산조각난 개념의 파편들을 딛고 장하준은 “시장도 결국 하나의 제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나 가족, 회사처럼 시장도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업이 상품생산을 위한 제도라면, 시장은 교환을 위한 제도이다. 국가는 생산과 교환을 위한 이런 네트워크를 창출하고 조절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필자가 이해하는 한 장하준은 이런 제도 간에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잘 작동하는 국가 없이 잘 작동하는 시장 없다”고 감히 주장한다.
장하준은 이런 방법론으로 ‘시장이냐’ ‘반시장이냐’란 윤리적 도그마에서 자신과 독자들을 해방시킨다. 드디어 그의 문제의식은 ‘비교적 평등하고 비교적 번영하는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이른다. 장하준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나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무차별적인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선진자본주의 국들의 ‘신자유주의’란 윤리적 도그마를 무참하게 비판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그를 ‘개발도상국의 대변자’로 부각시켰다. 그는 요즘도 개발도상국(개도국) 정부와 시민단체들의 요청으로 남미나 아프리카를 드나들면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선진국 경제 규모에 이르렀지만 국제적 공헌은 작다고 평가되는 한국의 국민으로서는 특이한 사례다.
장하준은 시장이나 국가나 재벌이 ‘절대 악’ 혹은 ‘절대 선’이라는 도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주의자이며 시장주의자다. 지금까지 봤듯이 윤리적 도그마에 반대하고 ‘구체적 시대·정치 상황에 대한 구체적 대응’을 주장하는 그에겐 당연한 일이다. 장하준에게 ‘재벌의 앞잡이’라는 이상한 칭호까지 선사한 ‘재벌-사회 타협론’ 역시 이런 인식 체계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요즘도 ‘원칙이 없다’거나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다음과 같이 케인즈의 어록을 인용하곤 한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