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질투』

가장 인간적인 감정인 질투에 잠식된 화자의 집요한 시선
직접 읽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묘사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널리 알려진 문제제기가 있다. “시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시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내게 시간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도무지 시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에 대해 생각할수록, 그리고 ‘시간’의 자리에 다른 단어들을 넣어볼수록 답변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그리고 스스로 가장 많이 질문했던 것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였다. 나 역시 소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소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소설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적절한 대답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히 소설은 곧 이야기라 여겨진다. 라틴어로 쓰여 교육받은 소수 독자들을 위한 문학이던 시와 달리, 로마어로 쓰인 데다가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던 소설은 많은 대중을 위한 ‘저급한’ 문학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소설의 태생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소설을 소설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허구성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많은 독자를 울리고 웃기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 소설의 의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근대를 지난 현재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57년은 프랑스에서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가 발간된 해다. 『질투』는 프랑스 문단의 반응을 둘로 갈라놓았는데, 전통적 소설을 애호하던 사람들의 반대와 혐오, 그리고 모리스 블랑쇼와 롤랑 바르트 등을 위시한 사람들의 지지와 찬사가 그것이다. 자신의 전작들 역시도 (그리고 이후에도)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로브그리예는 『누보로망을 위하여』라는 책을 통해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바로 이 점에서 세계는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우리 주위에서 한 무리의 우리의 정신주원론자의, 혹은 가정주부의 형용사들에 도전하면서 사물들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 사물들의 표면은 선명하고 매끈하며 손대지 않는 채로 있을 뿐, 의심스런 빛도 없고 투명하지도 않다. 우리의 문학 모두가 지금까지 그 사물들의 가장 사소한 구석에 상처를 내는 데 이르지 못했고 그 조그마한 곡선도 누그러뜨리는 데 이르지 못했다.”

‘카메라의 눈’ 기법이라 불리는 시점을 통해 『질투』의 화자는 망막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 인물들의 표면을 감각하고 기록한다. 화자의 의식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으며, 화자가 보고 있는 모든 장면들은 주관의 개입 없이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사건들에 대한 진술보다는 ‘A…’와 프랑크라는 인물이 그리는 동선의 궤적에 대한 집요하고 반복적인 묘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시계는 반복적으로 6시 30분을 가리키며, 식당 벽에 죽은 지네가 눌러붙은 자국도 반복적으로 지워진다. 화자의 행위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화자가 보는 것, 보고 있는 것을 통해 화자의 심리와 행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몇 년 전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질투』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 책의 소유주였던 친구는 내게 그 책을 가지라고 했다. 본인은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며 끝까지 읽고 재미있으면 알려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처음에는, 어째서 기둥의 그림자가 테라스의 동위각을 정확히 반분하고 있는지, 어째서 바나나 나무들이 오점형으로 늘어서 있는지, 어째서 편지지에 네 쪽으로 접혔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어째서 작가가 이런 것들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른 페이지쯤 읽어나갔을 때 책을 읽는 일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자의 시선에 동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화자의 시선이 어째서 이토록 집요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자는 A…와 프랑크의 관계를 의심한다.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A…는 화자의 부인으로 짐작되며 프랑크는 이웃 농장의 주인으로 여겨진다. A…와 프랑크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시내로 떠나며 역시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그날 밤 돌아오지 않는다. 『질투』의 화자는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은 A…와 프랑크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A…와 프랑크의 관계에 대해 묘사할 수는 없다. 화자의 의식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A…와 프랑크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화자의 심리상태가 불거지는 순간 나는 ‘질투’라는 이 책의 제목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어째서 방은 정사각형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육면체라고 해야 하는지, 테라스 주위에 있는 타일은 더러운 곳 하나 없이 깨끗한지, A…의 상반신이 집의 서쪽 박공에 있는 세 번째 창문의 틀 안 화면에 등장하는지, 어째서 화자는 이 모든 것들을 지독하게 묘사하는지를 깨달았다. 화자의 집요한 시선은 질투에 사로잡혀 모든 현상의 이면을 뜯어보고자 한 데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모든 소설들에서 동일한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소설이 제공하는 것은 오

락적 재미일 수도, 지적인 즐거움일 수도 있다. 로브그리예를 비롯한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들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항구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무엇이 소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여전히 쉽게 대답할 수 없지만 『질투』를 예를 들며 “이것도 소설이다”라는 대답을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질투』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몇 마디 말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은 직접적인 독서행위를 통해 경험돼야 한다.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라 여겨지는 질투에 잠식된 화자의 시선을 좇아갈 때, 우리는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정밀하고 객관적인 세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소설에서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가능하며 동시에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또 소설은 더 이상 한 줌의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그래도 여전히 소설이라는 형식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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