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동향] 함석헌 사상 재조명

씨알사상은 물론 함석헌 사상 전체 아우르려는 학회·학술지 등장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인가에 대한 논쟁도 치열

지난달 12일(월) 「교수신문」이 각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 5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대 백년 역사 속에서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함석헌은 전체 57표 중 14표를 얻어 207명의 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정됐다. 학자들은 함석헌이 동·서양 사상을 조화시킨 탁월한 인물이라며 현대에도 그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입을 모았다. 2009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씨알사상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후 그의 철학을 논하는 한·일포럼이 개최되는 등 함석헌에 대한 연구 열기는 계속 이어져 왔다. 최근에는 씨알사상을 넘어 그의 사상 전반을 연구하는 학회가 창립되고 학술지도 창간돼 함석헌 사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 포용하는 사상의 파노라마

20세기에 태어나 ‘억압받는 민중’의 격동기를 거친 함석헌 사상은 씨알에서 시작해 기독교와 역사학, 생명철학까지 다양한 분야에 이른다.

가장 먼저 함석헌 사상을 받아들인 신학계는 민중신학의 길을 열었다. ‘하나님의 섬김과 민중의 섬김이 같다’는 사상은 당시 한국 기독교에 비판적이던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을 개척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경재 씨알사상연구원장은 “그의 사상은 민중신학과 상호 보완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비교적 근래에 시작된 연구지만 철학계에서 씨알은 광범위한 함석헌의 사상 가운데 짧은 기간이나마 유독 주목을 강하게 받았다.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는 주류철학에 편승하지 않고 ‘민중’에 주목한 씨알사상의 특이성에 학자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학계도 주류 실증 사관에 반해 뜻과 해석을 중시한 함석헌 사상을 조금씩 다뤄오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김조년 교수(한남대 사회복지학과)는 “역사학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지만, 함석헌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성서를 통한 역사해석이라는 독특한 사관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새롭게 주목받는 함석헌의 생명철학은 ‘인간 우선주의’로 요약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생태학 메커니즘을 이해하므로 다른 생명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인간 우선주의가 인간의 오만함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의 소중함은 모두 하나’임도 함께 강조하며 환경보호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정리·체계화 작업 넘어 학제적 연구까지 지향

함석헌 사상 특유의 포용력으로 그동안 각 분야에서 그의 사상을 흡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 학계는 사상의 신선함과 특이성에 관심을 기울일 뿐 여전히 함석헌 사상의 위치는 각계에서 ‘비주류’다. 또 함석헌이 재야철학자였다는 점도 이에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6일 ‘함석헌학회’가 창립되면서 철학, 역사학, 신학, 생명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비주류로서 산발적으로 연구 중인 함석헌 사상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김조년 교수는 “4~5년 전부터 광범위한 분야에서 자리 잡은 함석헌의 사상을 정리하고 하나의 큰 연구체계를 만들자는 논의가 꾸준히 있었다”며 흩어진 함석헌 사상을 체계화할 필요성이 있음을 밝혔다.

최초로 창립된 함석헌학회는 함석헌 사상을 정리·체계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제 간 연구까지 표방하고 있다. 각계에 흩어진 함석헌 사상 간의 통섭이 보다 수월한 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사상 속에 내재된 ‘포용성’ 때문이다. 김경재 연구원장은 “함석헌은 원효의 회통사상을 이어받아 사상 간 ‘조화’를 추구했다”며 “그의 생명철학에서도 이것이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함석헌은 물질계와 정신계, 생명계가 구분은 돼 있지만 연결돼 있기에 서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조년 교수도 “함석헌의 생명철학은 정신의 산물인 종교와 물질의 산물인 과학의 통섭을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함석헌의 포용적 사상이 그의 사상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뿐 아니라 ‘통섭’이라는 학문의 과제까지 제시한 셈이다.

학회 창립과 함께 19일 창간된 학술지인 『함석헌 연구』도 함석헌 사상의 학제적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학술지에는 지금까지 발표된 함석헌 관련 논문의 목록 등이 지속적으로 실릴 예정이다. ‘함석헌 연구’ 창간호의 필자를 맡은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사상을 다루는 최초 학술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며 “정리된 목록이 학제 간 연구는 물론 함석헌 연구 아카이브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함석헌의 사상은 사회진화론?

함석헌 사상이 재조명되면서 새로운 쟁점도 불거지고 있다. 논쟁은 김영호 교수(인하대 철학과)가 함석헌 전집 서문에 그를 사회진화론자로 언급한 것에서 시작됐다. 함석헌의 ‘전체론’은 전체 사회에 대한 보편적 심성을 담은 씨알의 잠재력이 개인으로부터 발현되면 개인은 물론 사회까지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공동체주의와 맞닿은 그의 전체론이 씨알인 개인에서 사회,  국가, 민족을 넘어 세계로 나가기에 김 교수는 그것이 ‘사회가 진화한다’는 사상과 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 ‘힘의 논리가 전제된 사회진화론이 함석헌 사상과 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정현필 사무국장은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 존재한다는 것이 통념인데 함석헌 사상은 사랑과 포용의 논리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상이므로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반박했다. 김경재 교수 역시 “사회적·학문적 통념을 무시하고 본인의 관점에 치우친 해석은 곤란하다”고 비판하며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라 견제했다.

부딪히는 두 입장이 해결지점을 찾으려면 사회진화론의 성격과 범주가 명확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호 교수는 “사회가 진화해야 한다는 총론을 담은 것이 사회진화론”이라며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을 힘의 논리로만 보는 통념은 바뀌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국종교연구소 이민용 선임연구원도 “사회진화론을 기존 논의에서 벗어나 확장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함석헌이란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증가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논란도 생겨나는 시점이다. 함석헌 연구가 체계적인 학제적 연구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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