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종훈 대표신부를 만나다

한국 사회에는 성직자(聖職者)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성역(聖域)이 있다. 그 성역은 ‘삼성’이라는 견고한 철옹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까지 성역을 건드린 자들은 파수꾼이나 경비병에 의해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신성모독죄로 대중에게 돌을 맞았다. 성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과 함께 삼성과의 투쟁을 이끌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 전종훈 대표신부는 이듬해인 2008년 8월 갑작스레 안식년을 발령받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상대들과 맞서온 전종훈 신부는 안식년에도 안락을 누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거리로 나섰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 그리고 또 용산에서 길 위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왜 거리의 사제가 되었을까. 그는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났을까. 그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가 길 위에서 꾼 꿈은 무엇일까.
인터뷰|김아람 편집장 정리|이대한 부편집장 사진|이다은 사진부장 삽화|유다예 기자


삼성이 내린 큰 선물

“요즘은 백수에요.” 부자세습과 지배구조 유지를 위해 한국 사회를 검은 돈으로 물들여온 삼성의 치부를 폭로하고, 삼성이 큰 수혜를 입을 한미 FTA의 걸림돌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 촛불미사를 주도한 전종훈 신부는 그 덕에 원치 않던 ‘안식’을 얻었다. “삼성이 내게 큰 선물을 줬어요. 덕분에 2년째 안식을 누리고 있죠. 어쩌면 영원한 안식을 누릴지도 모르겠어요.(웃음)”

2008년 8월 21일, 전종훈 신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로부터 갑작스럽게 9월 1일까지 주임신부로 봉직한 수락산 성당을 떠나 안식년을 지내라는 발령을 받았다. 성당을 떠난 신부의 삶은 어떠했을까. “인사조치 직후 오체투지 순례단에 합세해 작년 6월까지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 말 그대로 땅바닥을 기어다녔죠. 6월 6일에 임진각에 도착한 직후 1주일 정도 몸을 추스르고는 용산에 천막을 들고 들어갔죠. 희생자들의 장례를 치른 지난 1월에 용산에서 모든 걸 정리하고 나왔으니 1년 반을 길바닥에서 살았네요.”

사제단 문규현 신부와 불교환경연대 수경 스님의 오체투지 순례단에 합세한 전 신부는 이들과 함께 한반도 구석구석을 몸으로 훑었다. 오체투지란 사지와 이마를 땅바닥에 밀착시켜 절하는 것이다. 그가 가장 낮은 곳에서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길바닥에 엎드려보니 우리 사회엔 사람이 없었어요. 순례하느라 사람이 엎어져 있는데도 옆으로 지나가는 어느 차도 서행한 경우가 없어요. 그냥 자기가 가던 속도로 계속 가더라고요. 그리고 열이면 열사람이 ‘저 새끼들 왜 저래, 길 막히게’ 하고 손가락질 했죠. 사람들에게 길은 오로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 그 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오직 무한질주만 있을 뿐이죠. 자본의 무한질주처럼.”

오체투지가 끝난 후 전종훈 신부는 용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맞닥뜨렸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용산 문제가 철저하게 삼성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1년 반 넘게 삼성과 싸우면서 삼성은 무엇이고 도대체 무슨 힘으로 거대한 권력을 움직이는가를 절실히 경험했으니까요. 실제로 용산의 뒷배경은 삼성이었어요. 용산의 개발지구별 컨소시엄엔 전부 삼성이 포함돼 있었고, 참사가 벌어진 용산4지구의 컨소시엄의 대표사는 삼성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참사에 대한 어떤 반성이나 사회의 방향 전환 없이 가진 자의 논리, 즉 삼성의 논리대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된 것 같아 서글펐죠.”

비애감을 안은 채 천막 생활을 청산하니 백수 생활이 전종훈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바닥에 살 때 행복했던 게 먹고 자는 걱정을 안 했어요. 길 위에선 알아서 다 해결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길바닥 생활이 끝나니 뭘 먹을까, 어디 갈까가 걱정이에요. 그래서 그동안 지방의 사제단 신부님들 찾아다니면서 오체투지와 용산에서 함께한 것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하고 그러면서 덤으로 밥도 얻어먹고 그러고 있어요. 허허.”

최후의 기댈 언덕

모든 사제가 거리 생활과 백수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권이나 재벌에 맞서지 않더라도 성직자의 삶은 이미 충분히 지난한 길이다. 그러나 성소(聖召)의 길과 더불어 전종훈 신부는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가시밭길을 기어코 걷고 있다. 무엇이 그를 가시밭길로 이끌었을까. “세상이 말할 수 없고 세상이 행동할 수 없을 때, 그때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또 세상에 어떤 데도 비빌 언덕이 없을 때, 그래도 그때 비빌 언덕이 돼주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전 그렇게 믿었어요. 사제단은 1974년에 결성된 이후 그 역할을 해온 것 같아요. 저도 그 모습을 지켜봤고. 신부가 되니 자연스레 사제단에서 활동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지금 이렇게 됐네요.”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라는 양심선언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같은 해 9월,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하며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됐다. 이후 사제단은 한국 사회의 말하고 행동하는 양심이자, 최후의 기댈 언덕이 돼왔다. 1987년 5월, 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조작 및 은폐사실 폭로가 6월 항쟁으로 이어진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전 신부도 사제단 신부로서 최후의 기댈 언덕이라는 역할을 계승하고자 했다. “사제단이 세상 모든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삼성 문제만 해도 김용철 변호사가 국회, 언론사 등 의탁할 만한 별별 곳에 갔는데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데가 우리 사제단이었죠. 이 사람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이다. 저흰 그것 때문에 김용철 변호사를 받아줬던 거예요.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나중에 판단했죠. 2008년에 시청 앞에 나갔을 때도 촛불이 공권력에 짓밟히고 있을 때였어요. 그때 저 촛불을 결코 꺼트려선 안 된다, 그래서 저희가 나갔던 거예요. 용산도 다 깨졌었죠. 그들도 더 이상 의지할 무언가가 없었어요. 이런 이들에게 숨통 구실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한국 사회의 숨통 구실을 하려는 사제단을 가장 숨 막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부가 왜 정치를 해?’라는 안팎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사제는 교회 안에만 있으면 된다. 왜 교회 밖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떠드느냐. 이런 생각들이 저희를 가장 힘들게 하죠.” 성직자는 개인의 영성 생활 영역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 정교분리를 채택한 국가에서 이는 당연한 얘기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전 신부는 이렇게 반문한다. “세상에 정치 아닌 게 어딨어요. 정치는 국회의원만 하는 게 아니에요. 편의상 정치는 위임받은 권력으로, 종교는 종교적 신념으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차이로 구분될 뿐이죠. 종교의 목표는 인간의 구원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해방, 자유와 동의어라 할 수 있죠. 사람이 무언가로부터 억압받거나 묶여있어선 제대로 살 수 없어요. 그걸 풀어주는 게 종교의 역할이죠. 그런데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사회의 구조악(惡)이라면 그 구조악을 제거해야죠.”

개인이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듯 교회도 언제까지나 사회 속의 교회다. 사회의 문제는 곧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 구성원은 모두 사회 구성원이에요. 교회 구성원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권력과 자본이에요. 이것이 빚어낸 사회적 모순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곧 교회의 모순이 되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야 해요.”

성역이 된 삼성을 말해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사제단은 한국 사회에서 인간의 구원을 억압하고 있는 구조악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전종훈 신부는 단언한다. “한국의 문제는 삼성의 문제고, 삼성을 알면 한국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단언은 삼성과의 오랜 투쟁으로 인한 적개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진단은 삼성이 자본과 권력의 강한 결탁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자본은 자신을 유지·확대하려고 끊임없이 권력 장악을 시도하죠. 여기에 도덕성이 없으니 권력 유지를 위해 자본을 붙잡으려 하는 정치권력의 생각이 맞닿은 거죠. 삼성은 이런 권력의 생리를 잘 아니까 지방의 작은 조직이나 개인에게까지도 그들이 삼성에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여기면 다 뇌물을 줬어요. 뇌물을 받은 권력은 속성상 그 뇌물에 굴복할 수밖에 없거든요. 뇌물과 함께 도덕적 권력의 기반이 없어지니까요. 그걸 철저하게 노리는 거죠.”

삼성과의 싸움을 다시 떠올리는 전 신부의 표정은 어두웠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이후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물러났던 이건희는 유죄판결 100일여만에 사면 받았다. 지난 3월 24일에는 약속을 뒤엎고 경영복귀까지 선언했다. 이를 바라보는 전 신부의 기분은 어땠을까. “당연히 비애감도 느끼고 이런 사회에서 내가 살아야 하느냐는 자괴감도 느꼈죠.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삼성을 말할 때부터 ‘한국 사회는 이런 사회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시작했어요.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희에게 왜 삼성을 말하느냐고 손가락질 했거든요. 이미 삼성은 말할 수도 없는 성역이 돼버린 사회에요. 전 삼성을 말했다는 이유 하나로 사회적으로 얘기하자면 정직당한 사람이에요. 한국 사회의 성역을 깨뜨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죠.”

그러나 전 신부는 결코 삼성이라는 기업을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삼성이 살아야 한국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삼성이 건강해지면 한국 사회가 건강해져요. 그것 때문에 삼성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삼성을 죽이려고 한다. 소리치는 저놈만 죽이면 다 살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해요. 한국의 사회 분위기가 뭐든지 덮어버리면 된다는 식이에요. 그러나 덮어둬선 하나도 달라질 게 없어요. 오히려 문제를 그대로 두면 썩게 돼있어요.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받죠.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덮는 데 익숙해진 이유를 저는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봐요. 다치면 안 된다. 그동안 워낙 다치며 살아와서 그나마 가진 조그만 것마저도 뺏길까 하는 두려움. 정치적 피해의식에 경제적 피해의식까지 덧칠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가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말하기는 대단히 어려워요.”

그렇다면 정말 희망은 없을까. 성직자인 전 신부는 역시 희망을 종교에서 찾았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희망은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거죠. 예수님도 종교적 쇄신,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다가 죽었어요. 죽음만을 따진다면 그는 패배자에요. 그런데 예수는 그 죽음을 통해 희망, 즉 이기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줬어요. 그게 부활사건이죠.”

죽어서 살고 패배해서 이긴다. 성직자가 아니면 쉽게 따르기 힘든 길이다. 워낙 힘든 길이라서 그런 것일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가 오히려 탐욕에 물든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빨리 종교가 종교다움으로 돌아와야 해요. 지금은 자본이나 권력과 결탁해 종교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못하고 있어요. 성직자와 종교지도자가 먼저 종교다움의 모습을 보여주고 종교인들에게 그 가르침을 잘 전해야 해요. 그 때 우리 사회는 정화되고 변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법정 스님은 종교 본연의 길을 가신 분이에요. 그런 종교적 가치가 빨리 회복돼야 해요.”

가난한 하느님 나라

전 신부가 생각하는 ‘종교다움’이란 무엇일까. “종교의 기본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을 가장 훼손하는 게 ‘돈’이거든요. 반대로 저희는 인간의 가치가 구현되는 사회를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전제조건이 ‘가난’이에요. 가난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인간적 가치도 존중되지 않는다고 믿죠. 성서에도 예수님이 진복팔단(眞福八端), 진짜 복 여덟 가지를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로 말한 게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거예요. 가난이 뒤에 나오는 일곱 가지 모든 복을 전제하죠.”

물질문명 사회에서 가난을 추구하라. 성직자가 꿈꾸는 허황된 이상일 뿐일까. “가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요.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그러나 가진 사람, 아쉬움이 없는 사람은 별로 다른 사람을 눈여겨볼 이유가 없어요. 마치 컵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물을 더 따를 수 없는 것처럼. 컵은 물을 계속 비워야만 그 기능을 지속할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가난해야 채움도 가능해요. 그래서 법정 스님은 텅 빈 충만을 말씀하셨죠.”

그래서 그는 함께 사는 삶으로의 전환에 대한 희망은 젊은 세대에게 더 밝다고 말한다. “세상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은 기성세대가 아니에요. 기성세대는 편한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죠.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든 옳은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고, 그런 사람들의 피눈물이 오늘 우리 사회를 이만큼 만들어 놓았어요.”

하지만 4·19 때와 5·18 때의 대학생들과 지금의 대학생들은 너무나 다르다. 대학은 취업 준비 학원으로 변질됐고 학생들은 스펙 쌓기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앞에 서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금 대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회적 탐구와 참여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정말 치열하게 관찰해야 해요. 내가 사는 사회니까. 그리고 참여해야 해요. 탐구만으로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으니 현장에서 4대강, 철거민, 노동자 문제에 부딪히며 현실을 분명하게 느껴보길 바래요. 그 경험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자산이 될 겁니다.”

다음은 4대강이다

전종훈 신부의 백수 생활을 얼마나 지속될까. 아직 진실과 양심이 비빌 언덕이 많지 않은 한국 사회는 그를 백수로 머물 수 없게 한다. 우선 4대강이 전 신부를 기다리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정권의 실체에요. 4대강 사업의 본질은 탐욕이에요. 권력과 자본의 탐욕이 같이 맞물린 결과물이죠. 권력으로 강을 죽여가면서까지 자본의 이득을 창출하고, 다시 그 자본으로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순환구조를 만들려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끊어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시민단체, 환경단체, 종교단체가 활동하고 있지만 크게 문제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국민 대부분은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덤덤하게 있고요. 4대강 사업 문제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죽어서 산다.’ 그 형용모순에 담긴 ‘신앙의 길’을 ‘사회 속’에서 걸어가는 전종훈 신부. 늘 지는 싸움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가 있어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정의를 위한 싸움을 준비할 수 있다. 아직 이 사회에선 ‘이기는 게 정의’일지라도 언젠가 패배가 모여 승리하는 기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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