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가장 낮은 사람을 돌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의 ‘전태일 재단’. 5월의 화창한 봄날, 『대학신문』은 노동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故전태일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곳에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노동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갖은 탄압도 무릅쓰며 팔을 걷어 부치고 참여했던 이소선 여사는 이제 팔순을 넘긴 노인이 됐다.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이소선 여사에게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은 여전히 크나큰 마음의 짐이다. 그는 “아직도 앞날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들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소선 여사에게 전태일 열사와 함께 했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평생의 유일한 행복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것을 느꼈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대화로 나눈 누구보다도 끈끈한 모자였다. 그는 “태일이는 여직공들의 가난한 삶에 울분을 표하며 노동자들의 현실 개혁이 절실하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며 “아들과 노동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난한 보따리장수였던 나의 의식도 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는 목숨을 거두면서도 “어머니는 노동운동을 계속해달라”는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여사는 전태일 열사가 목숨을 거둔 뒤 아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여생을 노동운동에 몸 바쳐왔다.

청계피복 노동조합 등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 1985년 구로동맹파업 등 굵직한 노동 집회에는 ‘살아있는 전태일’ 이소선 여사가 빠지지 않고 서 있었다. 왜 그렇게 고난에 시달리면서도 편안히 살아갈 방법을 택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노동자가 탄압받는 현실이 정치가 잘못된 결과라는 확신은 변한 적이 없다”며 “국민의 생존권이 보장 받는 사회가 곧 민주화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6번의 옥살이와 갖은 고난과 시련에도 그는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아들의 마지막 부탁으로 시작했던 이소선 여사의 노동운동은 그의 사람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이 더해지면서 진정성 있는 외침으로 세상에 울려 퍼졌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운동 현장에 있던 당시의 대학생들에 대한 말을 꺼내기도 했다. 그는 “정말 많은 대학생이 노동운동을 하다가 죽어나갔다”며 “노동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했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나마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같이 다 내 자식 같은, 죽지만 않았으면 나라를 이끌어갈 훌륭한 아들과 딸들이었다”는 말을 전하는 그에게 노동운동을 벌이다 희생당한 대학생들도 자식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특수고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들리는 노동자들의 신음소리 때문에 그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는 “모두 다 함께 모여 한꺼번에 행동하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며 “지금과 같이 권력 하나로 국민을 탄압하는 세상에서는 국민들의 하나된 마음이 사회를 바꿀 힘”이라고 주장했다. 모두 동참해 지금의 현실을 개혁하지 않으면 결국 힘든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소선 여사의 삶은 그 자체로 사회적 실천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현실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고 전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거동이 불편한 팔순의 이소선 여사에게 노동자 문제는 손 놓고 주저앉을 수 없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벌써 40년이 넘었지만 그의 노동운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소선 여사가 전태일 열사에게 전했던 “세상의 낮은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에 빛과 소금이 됐다.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어느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