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순 교수
독어독문학과
일생에서 지나간 시간이 남은 시간보다 많아지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수명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 시점을 의식하게 되는 때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실제 생활에서는 정해진 시간이 있기 때문에 매사에 시작과 끝이 있어 누구나 지난 시간과 남은 시간을 헤아리게 마련이다. 나도 진작부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거의 매일 의식한다. 고통과 상처의 자연치유를 기다리며 시간의 느림을 탓하던 일은 대체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특히 정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했거나 뜻했지만 시작조차 못한 일들이 떠올라 조급해진다.

존재의 시원은 언제이며 그 근원은 무엇일까. 태초의 생명의 빛을 요한복음은 로고스라 하였고, 괴테가 탐구적 인류의 대변자로 제시한 최고 지성 파우스트는 그 의미를 말씀, 뜻, 힘에 이어 ‘행동’으로 확정하고는 만족한다. “죽느냐 사느냐”(있음과 없음)로 고뇌하는 햄릿의 근원적 문제가 헤겔에게서는 유와 무의 변증법적 종합으로, 그러한 종합의 실현운동 곧 사멸과 생성을 통합한 형성(werden)만이 유일한 궁극의 진실이라고 설파된다. 우주의 시원이라는 빅뱅을 아인슈타인의 공식 E = MC²에 따라 무한대의 에너지로 설명하는 우주생성론을 보면, 문학과 철학과 천체물리학이 유유상종함을 발견하게 된다. 우주의 시원이 에너지였다면, 행동과 형성을 발현시키는 원동력도 그러한 에너지의 일종이겠기 때문이다.

에너지 또는 그 발현인 움직임(행동, 형성, 변화)만이 유일한 궁극적 진실이라는 관점은 반추할수록 설득력이 있다. 영속적인 정지상태란 영상이나 상상으로만 가능해 천체로부터 물질의 최소 구성요소라는 미립자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서 독감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현실세계에서 정지하며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간이라는 3차원 세계만으로는 우리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 공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시간은 공간을 초월한다. 그러니 시간이 곧 궁극의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도대체 에너지(생명력)와 그 발현으로서의 온갖 존재와 그 움직임은 오로지 시간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궁극의 진실은 움직임인데 움직임은 시간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고 인식될 수 있다. 예컨대 오늘 처형당하는 사형수가 시간이 흐른 훗날에 애국자로 복권될 수 있고 그럴 경우에 그의 실상은 범죄자가 아니라 애국자이다. 판 이론을 입증한 지질학자들도 태양활동을 관측하는 천문학자들도 한결같이 인류와 지구의 수명을 점친다. 광년으로 계산하는 우주적 시간 속에서는 인류의 역사 전체가 찰나보다도 짧다. 오일 피크라는 분수령의 시점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석유문명의 역사는 겨우 1백년 남짓에 불과하다.

이처럼 긴 시간의 한 순간 속에서 생명체로, 그것도 인식의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음은 분명 엄청난 특혜이고 영광이다. 게다가 나는 수십 년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전쟁터에 내몰린 아저씨와 형님들의 ‘고유하지 못한 죽음’ 곧 떼죽음을 모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몇 배나 컸을 터이고, 지금보다 한 두 세대만 늦게 태어나도 개인 승용차를 운전할 행운을 누리게 될지 확실하지 않다. 시간 속에서 나는 우주적이고 지구적인 행운아에 속한다. 그래서 남은 시간과 남은 움직임이 더욱 반갑고 소중하다. 내게 부여된 시간을 공유했거나 공유할 모든 움직이는 현상과 존재들도 귀중하다, 그들이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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