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용어 표준화, 학문 간 소통 장벽 허물까
학술용어 표준화, 학문 간 소통 장벽 허물까
  • 김은열 기자
  • 승인 2010.05.30 0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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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학술용어 표준화 및 정비 사업 완료

국가간, 학제적 교류 늘면서 중구난방 학술용어 정비 공감대 형성
무분별한 표준화는 다양한 용어 선택 자유 제한이라는 우려도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A씨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철학에서 사용되는 ‘intellectus’라는 용어가 책마다 ‘지성’, 혹은 ‘오성’으로 저마다 다르게 번역돼있기 때문이다. 각각 ‘인지하는 능력’과 ‘깨닫는 능력’을 의미하는 두 번역어는 엄밀히 따지면 다른 말이다. 이는 라틴어 ‘intellectus’의 영어(understanding)와 독일어(verstand) 번역어가 국내로 들어와 각각 지성과 오성으로 번역되면서 생긴 웃지 못할 일이다. 한국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학술용어를 학자마다, 학계마다 다르게 번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학총 정비사업, 자주 사용되는 용어90%이상 정리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학총)는 중구난방인 학술용어를 정비하는 사업을 2003년부터 6년간 시행했다. 그 결과물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돼 오는 8월부터 학총 홈페이지에서 검색 서비스로 제공된다. 학술용어 정비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2000년대 초 여러 학회에서 형성됐고 2003년 학총이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추진한 조동성 교수(경영학과)는 모든 학문 분야를 58개로 나누고 분야마다 대표 학회를 선정했다. 각 학회에서는 주요 학술용어를 표준 한국어로 번역한 결과물을 학총에서 수합한 뒤 각 학문 분야에서도 다시 표준화 작업을 거쳤다. 조동성 교수는 “정비사업 결과 52만개의 용어가 정리됐는데  이는 각 학문 분야에서 사용 빈도수가 높은 단어 90% 이상이 포함돼있다”고 말했다.

기술 및 의학 분야에서는  용어 표준화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일찍 형성돼 정립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과학기술용어의 표준화를 위해 『핵심과학기술용어집』을 발간하고 있다. 의학계는 1976년부터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학용어위원회를 둬 의학용어를 정비해왔다. 의학용어실무위원회 강종명 위원장은 “의학계에는 이미 학술용어 표준화의 중요성을 인식해 전문용어집이 5판까지 나왔으며 현재 6판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제각각’ 학술용어 정비의 필요성

학자들이 제각각 학술용어를 번역해 사용하거나 ‘오역’과 지나친 ‘의역’ 등으로  생긴 혼란을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비사업을 시작한 송희성 명예교수(물리학과)는 여러 학술용어가 혼재하는 원인으로 ‘한국 학문의 빈약한 기반’을 꼽는다. 개화기 척박한 학문적 토양에서 고전하던 한국의 학문 1세대가 일본에서 번역된 서구 학술용어를 여과없이 수용해 현재까지 학술용어의 혼란이 가중됐다. 철학 분야의 정비위원장을 맡았던 백종현 교수(철학과)도 “개화기에 일본에서 수입한 학술 용어 중에는 오역(誤譯)되거나 한자의 어감이 다른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가령 수학에서 유리수(有理數)는 ‘rational number’를 일본에서 ‘이성이 있는 수’로 번역해 만들어진 용어다. 그러나 ‘rational’은 ‘비율이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수학과 영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엉뚱한 단어로 번역한 것이다.

최근 국가간, 학문간 교류가 늘어나면서 학술용어 정비사업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학제적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학문 분야간 소통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송희성 명예교수는 “학제간 연구가 활발해질수록 용어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학술용어 표준화가 학제간 연구는 물론 교육 분야에서도 유용하다고 입을 모은다. 송희성 명예교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사회에서 쓰는 용어가 모두 다른 경우도 많다”며 제각기 다른 용어를 채택해서 생기는 혼란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가고시나 검정교과서에서 사용하는 학술용어도 마찬가지다. 백종현 교수도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운 인문학의 특성상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개념 확립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학술 용어의 정비 작업이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할 뿐 아니라 학문 성과를 대중과 공유할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표준화에 대한 우려도 제기돼

일각에서는 학술용어 표준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백종현 교수는 인문학에서 학술용어의 무분별한 표준화가 위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학술용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문학에서는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 개념의 차이가 사상의 차이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유를 응축한 용어를 구사하는 연구자에게 표준화의 강요는 ‘사상 통제’로까지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강현화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자신이 사용하는 학술용어에 대한 학자들의 깊이 있는 성찰이 선행되면 학문 분야에 따라 다수의 용어가 존재할 수 있다”며 무조건적인 학술용어의 표준화를 경계했다.

따라서 학술용어 정비사업은 학문 간 용어사용의 다양성과 표준화의 필요성을 모두 고려해야 할 부담을 안고 있다. 이에 조동성 교수는 “표준화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용어는 무리하게 한 가지로 통일하지 않고 병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물리 등 다른 학문 분야에서 ‘들뜬 상태’로 표준화한  ‘excited state’의 번역이 전기학회에서는 그동안 사용했던 ‘역이상태’로 유지됐다. 이번 철학분야 정비사업에서는 라틴어 ‘a priori’를 ‘선험, 선험적’으로 통일했지만 예외적으로 ‘선차적’이라는 번역도 인정됐다. 백종현 교수는 “표준화 정비사업은 개별 학문의 전문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되 소통의 측면에서 학계에 표준화를 권장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술용어 정비사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과제

현재 계획됐던 학술용어 정비사업은 완료됐지만 후속 사업이 예정돼있다. 조동성 교수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바탕으로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전문용어를 추가하고 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북한과의 용어 통일 작업과 한국 고유 학술용어를 번역하는 작업도 남아있다. 국사학과 국문학을 위시한 국학분야에서 사용하는 고유 학술용어뿐 아니라 ‘재벌’과 같이 한국 고유의 사회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도 번역 작업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학술용어 정비사업이 우려를 극복하고 학계의 성장을 일구는 밑거름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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