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서평] 헤르타 뮐러 『숨그네』

전영애 교수
독어독문학과
금년도 노벨문학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이었다. 헤르타 뮐러(Herta Müller 1953~)가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닌데다가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독일로 망명한 차우세스쿠 독재의 피해자라는 이력이 부각되다보니, 근년 들어 부쩍 두드러지는 노벨상의 정치적 배려가 과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이 낯설다. 제목만 듣고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수상작  『숨그네』는 루마니아 거주 독일인들이 2차대전 종전 이후 겪은 소련 강제노동수용소 이야기다. 새삼 수용소며 독재 이야기라니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쉽게 읽히지도 않아 더욱 거리감이 느껴진다. 서술방식이,  『숨그네』(2009)나 『마음짐승』(1994) 같은 새로운 조어의 작품 제목이 이미 단적으로 드러내듯, 참으로 비소설적이다. 절반쯤은 응축된 시라는 느낌을 준다. ‘숨그네(Atemschaukel)’는 중노동 속에서 들숨, 날숨 하나가 그네 뛰듯 다급하고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생존 위기를 읽어낼 수 있는 조어이다.

“정찰대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은 1945년 1월 15일 밤 3시였다. 추위가 심해졌다, 영하 15도였다.”  『숨그네』는 이렇게 시작되는  17세 소년의 소련 강제노동수용소 생활 - “지옥 내부”의 이야기다. 살아남아 5년 뒤에 풀려난 1인칭 화자가 이 이야기를 60년 뒤에 들려준다. 그러나 직선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니고 서술시간이 뒤섞여 있다. 매우 건조하며 동시에 매우 시적인 독특한 언어로 그려진 64개의 독립적인 작은 이야기들에서 서서히 전체 이야기의 윤곽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소용돌이 치는 변방의 역사
상시적인 죽음의 상황


 “우리는 수용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사람들을 치우는 일을 배웠다. 몸이 굳어지기 전에 옷을 벗긴다. 우리는, 얼어 죽지 않자면, 그 옷이 필요하다. 그들이 아껴두었던 빵을 우리가 먹는다.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는 죽음이 우리에게 득이 된다.” 베어낸 머리카락은 바람막이 배게가 된다. 그러니까 상시적인 ‘죽음’의 상황이 그려지는 것이다. 소설 『숨그네』의 배후에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변방의 역사, 독재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루마니아 최근세사와 독일사가 있다.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배경 역사를 잠깐 훑어보자. 1차대전  까지 합스부르크가의 왕령이었던 현 루마니아 일부 지역에는 당시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독재자로 인해 히틀러의 동맹이 됐던 루마니아는 1944년 소련의 압력으로 거꾸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45년 러시아에서는 그때까지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17~45세의 모든 독일인 약 8만 명이 성별 을 불문하고 전후의 재건을 위해 우크라이나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소재만으로는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는 작품이다. 분명 역사의 ‘진실’을 전달하려는 욕구와 소명에 글쓰기가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전달 언어가 남다르다. 끔찍함을 상세히 재현하면서도 판단은 없고 시종 거리가 유지된다. 직접적인 교훈은 더욱 찾을 수 없다. 작가의 감정이입 없이 힘들게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그야말로 비명이 억눌려 있다. 끔찍함과 끔찍한 것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시적인 픽션(fiction)의 힘이 혹독한 참상에 품위를 부여한다.

죽음의 불안은 삶에의 허기를 낳고
삶에의 허기는 말에의 허기를 낳는다


두드러지는 것은 피부에 와 닿는 절박한 배고픔의 이야기다. 상상의 한계 바깥의 극한적 기아와 중노동의 참상이, 배고픔이라는 매우 구체적 현상의 재현으로 전달된다. 허기의 환각에 압도당하고, 과도한 노동과, 굶주림과, 추위에 얼어서, 죽을 위험에서 벗어날 길 없는 삶이 그려진다. 잡초 명아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수인들, 구더기든 개미든 모래든 입에 처넣어 목숨을 부지하는 천치, 또는 아내의 멀건 양배추 국을 아내가 굶어 죽을 때까지 빼앗아 먹는 남편 등 벗어날 길 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해체된 사회, 모든 종류의 도덕적 체계가 와해된, 의(義)와 불의(不義)의 경계가 지워진 극한 상황이 면면이 그려진다. 

이런 “살거죽과뼈다귀시간”을 견디고 주인공은 귀향하지만 22세의 나이에 이미 ‘노인’이 돼버렸고, 여전히 남아 있는 허기, 입과 눈과 살과 존재의 허기는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나는 천천히 먹으려 했다, 국의 무엇을 조금 더 맛보고 싶어서. 그러나 내 허기가 한 마리 개처럼 접시 앞에 앉아 있었고 게걸스럽게 먹었다.”   열일곱 살 소년 레오 아우베르크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은 것은 할머니의 말 한마디 “내가 알아, 넌 돌아와”를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아우베르크는 구걸 중에 또래의 아들을 잃은 러시아 여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손수건을 ‘운명’으로 여기고 간직한다. 작품 안에서 사람을 지탱시키는 것은  “내가 알아, 넌 돌아와”라는 말이고 손수건 한 장이다. 작품 밖에서는 더더욱 언어이다. 작가의 말처럼 “죽음의 불안은 삶에의 허기를 낳고 삶에의 허기는 말에의 허기”를 낳는다. 그리하여 말들이 만들어진다. “허기천사”, “심장그네”, “목숨허기” “한방울과도한행복”(죽음) 서술 불가능한 상황이 시적인 언어로 재현돼 있다. 자연스러운 언어적 서술의 한계에서 시적 언어가 언어의 너머를 가리키는 지시와 여백 역할을 하고 있다.

숨그네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문학동네│352쪽│1만2천원
참혹한 삶의 한 토막을 그리는 시어
“소름 돋게 아름다운 슬픔”

참혹한 역사의, 참혹한 삶의 한 토막을 그리는데 그 언어가 아름답다,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들 논평한다. 그러나 미사여구라고는 전혀 없이 진정성만으로 그렇다. 작품의 위대함을 굳이 찾아보면 아마도 이 어름쯤일 것 같다. 두드러지는 것은 작가의 대담한 시적 능력이다. 시적인데, 마지막 단어에 이르기까지 정밀하다. 그리하여 이 독특한 시(詩)다움이 잔혹함을 눈앞에 그리게 하고, 초라한 삶에 그 품위를 되돌려 준다. 거리를 둔 서술, 자유롭게 뒤섞인 시간, 대담하고 뛰어난 작가의 조어력도 돋보인다. 혹자는 “소름 돋게 아름다운 슬픔”을 읽기도 한다. 이 대담한 언어예술작품, 유리처럼 투명한 언어로 하여, 누구의 글인지 모른 채로 읽더라도 아마 반 쪽만 읽어도 그 작가를 알 수 있을 만큼 자기문체가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이 여성작가가 남다른 것은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프리모 레비나(Primo Michele Lev),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 같은 작가들과는 달리 휴머니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시적 언어로 증언할 수 없는 것의 ‘증언’에 근접하고 있는데, 증언의 이런 새로운 형식에 주목할 만하다.  『아우슈비츠에서 무엇이 남았는가』에서 조르지오 아감벤(Giogio Agamben)은 증언의 문제에 주목한 바 있다. 여기서 아감벤은 불안과 공포로 산송장이 돼버린 인간(‘무젤만’, 무슬림사람)에 주목해, 증언의 능력이 없어진 증인의 주시가 불러일으키는 부끄러움에서 (아우슈비츠와 연관해서는 거론조차 하기 어려운) 윤리 문제를 조심스레 거론한다. 또 아우슈비츠가 범례가 될 수 있는 예외상황이, 동시대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제도적으로 생산되는가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는 부끄러움 (그런 것을 모른다는, 혹은 배부른 사회의 문제에나 골몰하고 있다는 부끄러움)과 안도감(그런 무엇을 스스로 체험하지 않아도 됐다는 데 대한 안도감)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이다.  『숨그네』는 가끔씩 깊이 숨을 들이마셔야만 읽어갈 수 있는 책이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작품이 이렇듯 윤리적 선도(鮮度)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부분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의 기록은 아니다. 같은 루마니아 출신 독일 시인 오르카 파스티오르(Oskar Pastior)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 함께 공저로 발표할 예정이었던 작품인데 파스티오르가 그 사이(2006) 타계했다. 파스티오르 없이 이만큼의 완성도는 어려웠을 작품이다. 파스티오르는 남다른 “언어” 감각의 소유자였다. 함께 우크라이나로 가서 놀랍게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수용소의 잔재를 살피기도 했다. 이 작품은 어느 정도는 파스티오르에게 바치는 오마쥬이다. 노벨상 또한 아마도 헤르타 뮐러의 작가적 역량만이 아니라 파스티오르의 삶과 언어, 파스티오르의 삶을, 그렇게 고통받은 모든 사람의 삶을 아우르는 것일 게다.

“정말로 할 이야기가 있다”

이런 글이 오늘날 어떤 뜻이 있겠는가. 헤르타 뮐러는 “정말로 할 이야기가 있다”, 즉 절실한 주제가 있다, “시의 압축성과 산문의 사실성을 도구로 실향(失鄕)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스웨덴 왕림학술원 노벨상 관계자의 심사평이다. 뮐러의 작품을 겉보기에  ‘유복한’ 이 시대 곳곳의 그늘들, 특히 관타나모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이라크든 곳곳에 여전히 존재하는 갖가지 수용소 시설들과 연결해 볼 때, 되새겨볼 만한 또 한 차원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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