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직 교수
서양사학과
기억은 개인적 차원의 정신현상뿐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공공의 기념문화, 즉 기념일, 기념비, 기념관 등을 생각하면 사회현상으로서 집단기억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한일강제합병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기념행사들이 많아 집단기억의 문제를 되짚게 한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기억이야말로 정체성의 핵심인 것이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그렇다. 집단은 집단적으로 공유한 기억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하고 집단의식을 갖는다. 기억은 집단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집단기억은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집단 사이에 갈등과 대립을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기억은 종종 집단 구성원의 의무가 되고, 의무화된 기억에는 비판적 이성은 사라지고 맹목적 열정만 남는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이 유용하고 어떤 기억이 위험한 것일까? 철학자 츠베탕 토드로프는 이타성을 도덕의 원칙으로 삼아 기억의 유용성을 논한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 선행의 수혜자 혹은 악행의 가해자로 기억하는 경우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토드로프를 원용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한 치욕과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적어도 도덕적인 면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일제 식민지배 아래 민족이 겪은 수모와 희생을 기억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의무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반일정서는 일제 식민지배의 기억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며, 이 기억을 이견이나 비판이 일절 용납되지 않는 성역으로 만든다. 기억이 절대적 가치를 갖고 금기시되면 망각은 불신과 지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종종 도덕적 죄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만큼 중요한 것이 망각이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이라는 점에서 망각이 없으면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사실 기억과 망각은 대척점에 선 별개가 아니라 낮과 밤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의존하며 하나를 이룬다. 망각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것은 탁월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들이다. 지난 세기 위대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그렇다. 기억을 모티프로 한 그들의 작품에서 작중 인물들은 차에 곁들인 과자 맛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회상하고, 우연히 들은 음악 소리에서 아득한 첫사랑을 떠올린다.

­이 작품들이 시사하듯 기억에 대한 두 작가의 태도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그들은 일부러 기억하려 않으며 인위적인 기억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기억의 의도성에 의해 진정성이 결여된 기억이다. 오래 잊고 있던 기억, 미각과 청각을 통해 촉발된 기억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두 작가는 기억 대신 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망각을 거치면서 기억은 모든 의지와 감정에서 정화되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망각의 퇴적층에서 기억은 눈으로 보는 명료한 것이 아니라 혀와 귀로 감지하는 미묘한 것이 된다. 망각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기억이 탄생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