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한혜영 기자 sweetdreamzz@snu.kr
노르웨이 생태철학자인 아느 네스(Arne Naess)는 생태주의에 대해 “환경 문제를 각종 사회 문제들이 겹쳐진 표면적 증상으로 판단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 감성 제고, 제도 구축 등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정신”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러한 생태주의의 자연친화적 가치관을 소리로 담아내는 이들이 있다. 풀피리, 재활용 악기, 야채 악기 등을 통해 자연에 주목하고 인간의 감성에 다가가는 생태주의 악기를 만나보자.

소외된 자연을 끌어안는 생태주의 악기

끊어질 듯 가늘게 떨려오다 이내 긴 곡선을 긋는 소리가 물을 차고 오르는 새의 비행을 닮았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8호인 오세철 명인의 풀피리 소리다. 그의 악기는 여느 관·현악기들처럼 세련된 모양새로 가공되지 않는다. 그저 자연에서 바로 뜯어 낸 목련 잎, 단풍잎, 산수유 잎들로 소리를 만들어 낼 뿐이다. 오랜 궁중음악서인 「악학궤범」에 초적(草笛)이라 기록된 풀피리는 최근 일부 초등학교에 그 교본이 보급될 정도로 널리 퍼지고 있다. 경기도 이천 설봉공원에 있는 성동훈 작가의 악기 ‘소리나무’ 역시 자연물을 이용한 악기다. 나무 형태의 스테인리스 구조물에 2천 7개의 도자 풍경을 달아 구름이 걸린 형상을 표현한 이 악기는 바람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소리로 담아낸다.

생태주의 악기를 만드는 이들은 악기 연주 속에서 자연과 깊이 교감한다. 오세철 명인은 강연과 공연을 하고 직접 작곡한 독주집을 내는 바쁜 와중에도 여전히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그는 “내 손으로 직접 농사지은 콩 잎, 옥수수 잎으로 한 곡 뜯는 소리가 기가 막히는데 그런 아름다운 소리로 잊혀가는 자연의 가치를 되새긴다”고 설명했다. 종종 야외에서 학생들에게 풀피리를 가르치는 의정부 효자초등학교 교사인 성수현씨 역시 “버들잎이나 갈잎 등으로 만드는 생태악기는 자연에서 구하는 것이기에 아이들이 저절로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며 소리를 얻는 과정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생태주의 악기의 특징을 말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실천하는 재활용 악기

버려진 물건 속에서 생태주의를 이끌어내는 단체도 있다. 폐자전거, 파이프, 옷걸이 등 각종 폐기물을 이용한 악기를 만들어 공연하는 사회적 기업 ‘노리단’이다. 그들의 손을 거치면 알루미늄판은 맑은 소리를 내는 실로폰으로, 폐플라스틱은 장난스러운 느낌의 북으로 변모한다. 호주의 생태주의 퍼포먼스 공연단 ‘허법’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지난 2002년 6월 발족한 노리단은 콘서트, 뮤지컬, 어린이 공원 리모델링 등 생태주의 악기를 활용한 각종 활동을 진행해 왔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예술가 집단 ‘에니그마타 트리하우스’ 역시 아이들 200여명과 함께 생태주의 악기를 만든다. 매년 열리는 ‘Earth Camp’에서는 관광객이 버린 술병, 봉지 등의 쓰레기를 주워 악기를 만들고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노래를 창작해 생태주의의 가치를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에니그마타 트리하우스’를 주도한 문화예술가 로잘리 제루도와 연을 맺은 뒤로 제주 아이들과 생태 체험을 해온 ‘곶자왈작은학교’의 문용포 대표는 “빈 요구르트 병으로 악기를 만들다 보면 주변의 모든 것이 악기가 됨을 알게 된다”며 “이런 재생 활동은 순환하는 자연의 일부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나 자신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악기를 통한 생태주의의 실천은 “내가 살 권리를 갖는다면 자연적 존재인 너도 살 권리를 갖는다”는 아느 네스의 정신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깨닫게 한다.

메마른 감성에 자연애를 불어넣는 생태주의 악기 놀이

잊혀 가던 자연에 주목하고 함께 어우러짐을 목표로 하는 생태주의 정신의 시작점은 흥미와 재미다. 노리단의 류호봉 실장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감수성을 갖는 데는 즐거움이 필요하다”며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창의적 놀이 생태악기는 생태주의에 관심이 없던 이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몸벌레’라는 노리단의 연주방법은 음악을 놀이로 만든 대표적 사례다. 손, 발, 엉덩이 등 몸을 두드려 리듬과 소리를 만들어내는 동작에 방아깨비, 사슴벌레 등 자연물의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몸을 벌레와 같다고 생각해야하는 이 놀이를 통해 참여자는 인간과 자연물이 다르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다.

‘비엔나 베지터블 오케스트’라 역시 장난스러운 겉모습 속에 자연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다.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연주 전에 연습을 하는 대신 전기 드릴로 악기를 만든다. 이들이 만드는 대파 바이올린, 당근 플루트, 순무 마림바는 그 독특한 모양새만이 전부가 아니다. 야채라고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아름다운 소리는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금세 그 음색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야채들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음색은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자연물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생태주의를 실천하는 대안학교 녹색대학의 석좌교수인 장회익씨는 “생태주의란 결국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음을 인지하는 철학”이라며 “자연친화적이고 이색적인 생태악기를 통해 많은 이들이 어렵고 고루하게 느끼던 생태주의에 쉽게 다가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생태주의 악기의 연주에는 여느 웅장한 강당도 시설도 필요하지 않다. 손이 닿는 곳곳에 있으나 미처 인식하기 전에는 숨을 죽이고 있던 생태 악기들이 이제 저마다의 소리를 내게 됐다. 어디에서든 아름다움과 재미, 자연에 대한 관심까지 두루 연주해내는 생태 악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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