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이름에는 ‘천재문인’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시와 소설에 한정되지 않는다. 책장에서 벗어나 이상을 오감으로 즐기고 싶다면 인간 김해경의 집터를 방문하거나 미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을 적극 활용해 이상한 나라의 이상을 지금 만나러 가보자.

이상의 집에 놀러가자

오늘날 종로구 옥인동과 누하동 일대인 경복궁 ‘서촌’은 예인들이 모여 살았던 조선 후기 중인 문화의 산실이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이중섭 가옥과 윤동주 하숙집 등 굵직한 화가와 문인들의 집터가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이상의 가옥터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지금 이곳에는 퇴락한 기와 건물에 상점이 자리해 요절한 천재의 쓸쓸함만 묻어나오지만, 앞으로 서울시는 이상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서촌 한옥 지구를 보존하고 문화행사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상, 현진건 등 근대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학탐방로’ 조성 사업이 검토 중이라 하니 기대해도 좋다. 이상에 미친 ‘아해’들은 주저 없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으로 ‘질주’해보자.

화폭에 재현된 이상(李箱), 그 이상(以上)

이상에 관련된 그림이라면 화가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이상 문학의 난해한 주제를 그림으로 만나는 일은 낯설고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13일(월)까지 개최되는 문학그림전 ‘이상, 그 이상(以上)을 그리다’에서는 화가들이 재해석한 이상의 문학 세계가 화폭에 펼쳐진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이인)는 이목구비 없는 얼굴과 뒤집힌 숫자 ‘13’을 통해 파격과 암호를 즐겨 썼던 이상의 문학 기법을 표현하며, 「이상드로잉-1」(한생곤)은 목판 잉크로 그려진 도형들의 중첩을 통해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복잡성과 무한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상에 관한 이상한 그림의 향연 속에서 그 속에 담긴 이상의 이상(理想)을 찾아보자.

무대 위에서 만난 ‘모던보이’

연극 무대의 객석에 앉아 이상을 즐기는 일 역시 놓칠 수 없다. 26일(일)까지 대학로 축제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오감도」는 이상 문학 텍스트에 근거해 이상을 21세기 명동 거리로 불러낸다. 최신 휴대폰 판매원에게 붙잡혀 얼떨결에 계약서를 쓰기도 하고, ‘프리허그’에 화들짝 놀라는 이상에게 일회적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오늘은 낯설기만 하다. 현대 연극 연출가 리 브루어의 「이상, 열 셋까지 세다」는 이상의 작품 세계를 재해석한다. 예를 들어 소설 「날개」에 나타난 금홍과 이상의 치정관계를 비디오아트, 페인팅 등의 회화적 장치를 이용해 ‘혼돈’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식이다.

이상 문학, 스크린으로 돋보기

극예술로 이상을 즐기는 데 있어 영화 역시 빠질 수 없다. 유상욱 감독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999)은 PC통신에서 만난 젊은이 5명이 70여년 전 일제의 음모를 파헤치는 미스터리물이다.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총독부 건물을 교묘하게 조작한 일제의 마수를 추적하는 데 이상의 수수께끼 같은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총독부 건축 기사였던 이상이 1932년 돌연 기사직을 그만두며 발표한 작품으로 총독부의 음모에 대한 은유적 폭로가 들어있을 것이란 추측에서다. 한편 김유진 감독의 「금홍아 금홍아」(1995)에서는 연인이었던 금홍과의 스캔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될 뿐 아니라 화가 구본웅과의 삼각관계와 이상의 여성편력이 포함돼 흥미를 더한다. 문학보다는 말랑하게, 통속 영화보단 품위 있게, 이상을 만나러 스크린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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