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보다 극적인 이상의 삶이 남긴 이야기들]

이상의 천재성을 증명할 일화는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작품마다 묻어나는 독특하고 다양한 이상의 면모는 건축가를 꿈꾸던 소년 김해경(金海卿)과 오버랩된다. 1926년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에 입학한 이상은 지난 4월 권영민 교수(국어국문학과)가 발굴·공개한 학적부에 따르면 평점 ‘갑(甲)’의 수석 졸업생이었다.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던 이상은 『조선과 건축』지의 표지 도안 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돼 1년 간 잡지의 표지와 삽화를 담당하기도 했다. 작품에서 이국적 언어를 비롯해 회화, 기하학, 물리학, 수학 등을 망라한 ‘잡종성의 텍스트’를 선보인 그의 재능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인간 이상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이상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많은 연구자들을 매혹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불우했던 삶인 것을 고려한다면, ‘르네상스 맨’으로 빛났던 이상의 삶 뒤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채 30년을 버티지 못한 병약한 육신은 이상의 작품 활동 기간을 단축하고 정신 쇠약을 불러왔다. 이상의 첫 수필 「병상이후」에는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진찰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실제로 데뷔작을 연재한 해에 결핵 진단을 받았던 이상 자신의 경험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경제적 무능력에서 비롯된 생활고 역시 이상을 죽음의 순간까지 따라다녔다. 여동생 김옥희의 글 「오빠 이상」과 친우 김기림의 추도글 「고(故) 이상의 추억」에는 연인 금홍과 차린 다방 ‘제비’의 폐업과 그 후에 잇따른 다방 경영 실패 경험으로 방황과 자학으로 점철된 이상의 삶이 묻어난다. 실제 이상은 폐결핵 진단을 받고 1933년 총독부 기사직을 사임할 때까지 4년여를 제외하고는 고정 수입을 가져본 적이 없다. 수필 『슬픈 이야기』에서 “동생도 다 자랐고 막내 누이도 새악시꼴이 단단히 백였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라는 구절은 이상의 자조섞인 고백이다.

혼란한 시대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가치혼란, 즉 아노미 현상은 이상의 연애관계를 위태롭게 했다. 정절을 요구하는 19세기적 엄숙주의와 자유연애를 옹호하는 20세기적 자유주의가 충돌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이상은 전통 여인상을 대변하는 동거녀 금홍과 신여성인 아내 변동림 사이를 오가면서 갈등한다. 이러한 현실의 여자 관계는 이상이 작품 속에서 전통 여인상과 신여성에게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이는 원인이 된다. 작품속에서 이상은 금홍 계열의 여성에게는 순종적이고 피학적인 태도를, 아내로 대표되는 신여성에게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이상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근대 남성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는데 실제로 이상은 슬픈 어조로 “나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이라 고백한다.

병마와 생활고, 그리고 연애문제까지 작품만큼이나 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상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한다. 그는 사망하는 해까지 꾸준히 단편을 발표하는 등의 초인적 힘을 발휘하고, 『날개』,『지주회시(蜘蛛會豕)』등의 작품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에 특히 가혹했던 자본주의의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우리가 ‘천재’ 이상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삶이 범인(凡人)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치열하게 생을 살아간 그의 모습에서 삶을 살아내는 의미와 진정성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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