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울대人(in) 연구회

개화기 근대 서구개념 답습으로 주체적 개념 정립 안돼
창조적 사회과학 위해 지속적 개념사·전파연구 필요

개화기 설립된 최초 근대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중원」에서 선교사 알렌이 고종에게 어떤 방식으로 예(禮)를 표했을지 궁금했던 이들을 위한 연구모임이 있다.

‘전파’ 양상으로 주체적 개념사 방법론 모색

지난달 26일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에서 ‘전파연구모임’의 8월 모임이 열렸다. 대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이 모임에서는 국내외 정치·사회·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발제하고 토론한다. 연구자들은 서구 문화와 사회과학 개념의 ‘전파(傳播)’ 양상을 추적해 한국의 주체적인 개념사 방법론을 모색한다. 여기서 전파란 ‘전해져(傳)’ ‘널리 퍼진다(播)’는 뜻으로, 영어로는 ‘defusion’, ‘transfer’, ‘hybrid’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전파연구모임은 1995년 하영선 교수(정치·외교학부)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부 모임에서 시작됐다. 모임이 만들어질 당시 연구자들은 한국 사회과학이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을 답습하는 데 그칠 뿐 주체적인 개념을 생성하지 못한다는 것에 공감했다. 개화기에 집중적으로 유입된 근대 서구 개념은 일본식 한자어로 오역되거나 정확한 지칭 대상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여러 개념의 정교한 의미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 사회과학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인식했다.

모방이 아닌 창조의 사회과학으로 나아가고자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은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독일 개념사 연구였다. 코젤렉의 개념사 방법론은 개념의 생성·변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배경과의 연관성을 중시한다. 전파연구모임은 코젤렉의 개념사 방법론을 참조해 개화기의 사료 및 외교 문서를 검토하며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서구 개념이 어떻게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개념부터 예법까지 ‘전파’ 양상 연구의 다양한 사례들

서구에서 전래된 개념 중에는 아예 새롭게 유입된 경우도 있고 기존 의미가 전이된 사례도 있다. 조선시대 국제 관계란 중국에의 조공 및 주변국과의 교린으로 대표되는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질서였다. 이런 질서 속에 ‘주권(sovereignty)’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주권 개념의 유입은 조공·책봉의 사대질서에서 조약과 국제법을 매개로 한 근대외교질서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반면 ‘부국강병’은 점차 개념이 정착되며 초기의 부정적 인식을 탈피한 경우다. 조선 사대부들은 부국강병을 유교의 ‘인의(仁義)’ 개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와 맞지 않는 ‘패도(覇道)’의 논리로 인식했다. 근대 질서 속에서는 스스로 자국의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는 ‘현실주의’ 사고를 수용하기까지 조선이 치러야 했던 성장통은 꽤 컸다.

서구식 근대적 예법의 전파 양상도 넓은 범주에서 개념사 연구의 대상이다. ‘근대식 접견례와 궁중연회’라는 제목으로 이정희 박사(서울대 박물관)가 진행한 발표는 서구 예법이 조선 전통문화와 혼합되고, 변이를 거쳐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는 과정을 다뤘다. 이 박사는 “서양 공사(公使)들이 고종을 알현할 때는 조선 사대부와 달리 절을 하지 않고 윗몸을 살짝 굽히는 서양식 예법이 허용됐다”고 말한다. 궁중 무용 등에서도 이와 유사한 전파 현상이 나타났다. 본래 연회에서는 궁중 무용인 ‘정재(呈才)’가 연희됐으나, 외국가무(歌舞)가 유입돼 혼재된 양상을 보이다 점차 다국적 특성을 띠는 서양식 무도 개념으로 전이됐다. 

동·서양의 접점을 파고들기 위한 장기적 노력 필요

15년이란 세월을 거치며 전파연구모임은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라는 책을 출간하는 가시적 성과를 내는 한편 몇 가지 변화를 겪었다. 국내외 정치·외교·사회·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였고, 세대 역시 다양해져 석·박사 과정생도 참여하게 됐다. 하영선 교수는 “교수들이 중심이 됐던 모임이 점차 다양한 세대의 연구자가 모이는 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개념사 연구는 이제 동·서양 학문의 융합을 요구하고 있다. 동·서양의 이질적 개념이 만나는 자리인 개념사 및 전파 연구를 위해서는 서양학문 전공자도 동양사상과 한문을, 동양사상 전공자들도 서구의 학문 조류를 모두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영선 교수는 “한문 지식은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지식을 갖출 때 동·서양의 접점에 있는 개념사와 전파 연구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개념사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한문 및 영어 원전의 방대한 텍스트에 대한 독해력과 개념의 장기적인 변화를 고찰할 인내력을 갖춘 연구인력이 절실하다. 이는 하영선 교수가 현재 한국 개념사 연구의 발전을 위해 후속세대 양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개념사는 20대 연구자들이 장기 투자해야 하며 단번에 성과를 내기는 어려워도 충분히 매력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이제 창조의 사회과학을 실현하는 것은 신세대 연구자들이 주도해야 한다. 가까운 미래 ‘메이드 인 코리아’ 사회과학 개념이 정립되기를 기대하는 이들은 전파모임에서 전파(傳播)한 개념사의 전파(電波)에 지적으로 감전돼 보는 건 어떨까.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