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서평] 칼 세이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얼마 전 국문학자이자 문화 운동가이신 이어령 선생께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커밍아웃’하신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종교에 대해 서슬 퍼런 비판의 칼을 휘둘렀던 매서운 손이 골방에서 신을 갈구하는 경건한 손으로 개종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때 무신론자를 자처하다가 느직이 종교에 귀의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어쩌면 실존적 고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개종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학의 보편성과 우월성 위협하는 미신과 종교 비판한 선도적 학자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킨 사람들도 많다. 예컨대 백혈병이 악화돼 임종을 앞두고 있던 천문학자 칼 세이건(C. Sa-gan, 1934~1996)은 기독교에 귀의하라고 권유하는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한다. “나는 단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전 세계 회의주의자를 대표하던 세이건은 이렇게 자신의 평소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다. (이 에피소드는 세이건이 임종 직전에 예수를 영접했다는 루머가 돌자 그의 미망인 앤 드루얀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사실이다.)

생전에 세이건은 천문학계에 ‘외계 지성체 탐사(SETI)’ 프로젝트와 ‘외계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선물한 선도적이고 창의적인 학자였다. 게다가 대중들에게는 친절하고 탁월한 ‘과학 해설자’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대중 지식인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점성술, UFO학 등과 같은 사이비 과학의 정체를 폭로하는 작업을 하면서 과학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위협하는 듯한 갖가지 미신과 종교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신 그는 늘 대문자로 표기하는‘NATURE’를 경외했다. 물론 그가 만들고 60여개국의 6억명 이상이 시청한 텔레비전 시리즈 ‘코스모스’는 과학 다큐 분야의 전설이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그가 1985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기포드 강연회에서 종교와 과학에 대해 강연한 원고를 미망인 드루얀이 사후에 발굴해 엮은 유고집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지난 시대의 대표적 과학자이자 회의주의자였던 세이건이 종교에 대해 어떤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탐구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세계 무신론자들이 이제야 십계명을 받은 것일까?   

우주적 질서의 경이감과 종교적 경외감이 맞닿아 있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뭔가 조금 이상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인용하며 강의를 시작한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라면 무신론의 낭떠러지와 미신의 늪 사이에서 아주 힘든 길을 나아가게 마련이다.” 이 첫 문장은 그를 그 누구보다 강력한 무신론자로 간주하던 독자들을 혼돈에 빠뜨렸다. 그리고 그런 혼돈은 책의 뒤표지에서 그를 치켜세우는 이 시대의 대표적 무신론자들, 리처드 도킨스와 샘 해리스의 추천의 말을 읽으면 더욱 심화된다. 세이건은 정말 무신론자였나?

그를 ‘무신론자·유신론자·불가지론자’와 같은 전통적 범주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의 광대함과 질서에서 무한한 경이감을 느끼는 천문학자이면서 동시에 그런 경이감이 종교적 경외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경건한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무신론적 경이감과 유신론적 경외감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잘 균형을 잡으며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든다. 각 장을 주의깊게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줄타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습에서 벗어나 과학과 기꺼이 소통하는 종교에만 손을 내민다

장대익 교수

자유전공학부
『다윈의 식탁』 저,
『통섭』 공역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강의로 구성돼 있는데, 6개의 강의 중에서 과학은 종교를 거의 ‘다운(down)’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가령 그는 우주와 자연에 대해 지적인 설계자를 상정하고 질서를 인격화하려는 우리의 오래된 사고 패턴을 강하게 비판하는데, 생명의 모든 복잡 미묘한 형질들이 초월적인 지적 설계자에 의해 창조됐다는 ‘설계 논증’을 논박하는 대목에서는 영락없이 다윈의 후예이다(2강). 또한 그는 다른 행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으려는 과학적 시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3강), 외계 지성체 탐사 작업의 과학적 의의와 인간학적 의미를 되짚어본다(4강). 이 광활한 우주에 지구만이 우리 같은 지성체를 진화시켰을 것이라는 믿음은 우주적 측면에서 보면 쇼비니즘일 뿐이며, 인류의 거의 모든 종교들 역시 이런 쇼비니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UFO학이나 외계인에 대한 대중적 믿음은 그에게 경계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종교적 열망이 왜곡돼 표출된 사이비 과학이기 때문이다(5강). 종교에 대한 그의 이러한 공격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기존의 증명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부분(종교철학적 관점에서 특별히 새로운 비판은 없었지만)에서 절정을 이룬다(6강).

반면 수세에 몰린 종교의 반격은 그리 인상적이지 못하다. 예컨대 종교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과(7강), 과학과 힘을 합해 지구의 미래에 드리운 불확실성을 걷어내자고 제안하는 대목(8강과 9강)에서나 종교의 긍정적 측면이 부각되는 정도다. 게다가 모든 종교도 아니다. 그는 “인습에서 벗어나 과학과 기꺼이 소통하는 종교”에만 손을 내민다.

이런 입장은 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콘택트」라는 영화에서도 여러 차례 오버랩된다.(이 소설은 기포드 강연회가 열렸던 해에 출간되었다.) 이 영화에는 과학, 종교,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쟁점들이 등장인물의 언행과 사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다. 외계 지성체 탐사에 헌신한 젊은 여성 천문학자가 어느 날 외계로부터 온 신호를 해독하자 정부는 그 해독된 설계도대로 직녀성에 갈 수 있는 운반체를 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그 운반체를 타고 웜홀을 지나 베가성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 모습으로 나타난 외계인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하지만 귀환한 그녀에게는 그 명백한 경험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없다. 마치 신을 경험한 신앙인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를 댈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이건이 누군가? 인격신의 개념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물질로 가득한 이 우주가 신 없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줄기차게 설파하던 사람 아닌가? 실제로 그는 직녀성에 다녀온 증거를 확보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그 증거가 존재하는 듯한 결말을 이끌어 냄으로써 증거에 기반을 둔 과학이 그렇지 않은 종교와 인식적 지위에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과학의 따스함으로 종교의 거추장스런 옷을 벗긴다

비극적인 911테러가 발생하고 벌써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물론 이 비극이 종교 때문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겠지만, 이 사건 이후로 종교와 종교인의 사고 습성에 대한 과학자들의 관심이 폭발한 것은 사실이다. 종교를 너무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만 보거나 그 영향력에 대해 간과하는 것 또한 세상에 엄존하는 갈등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지적도 이제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도킨스의 문제작, 『만들어진 신』은 그 결정판이었다.

그와 비교하면 세이건의 종교 담론은 온화한 햇볕정책에 가깝다. 세이건은 과학의 따스함으로 종교가 입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자발적으로 벗게 하고자 한다. 이런 햇볕정책이 일견 더 포용적이고 온건하며 심지어 공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구의 미래를 이끌고 나가야 할 힘의 근원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그도 과학적 사고와 지식을 들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첫 선언에도 불구하고, 경이와 경외 사이의 그의 줄타기는 기우뚱해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지금도 살아 있어서 911테러를 목격했었더라면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혹시 도킨스와 함께 반종교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떠오른 내 불온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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