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진보, 자아, 그리고, 자유의지. 이들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휴머니즘’의 가치인 동시에 듣기만 해도 긍정적 이미지가 그려지는 단어들이다. 어느 날 당신 앞에 나타난 누군가가 “진보는 신화며 자아는 환상이고, 자유의지는 착각이다”며 딱 잘라 이들을 부정한다면? 진리로 여겨왔던 휴머니즘에 칼을 들이대는 그를 우리는 염세주의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까지도 ‘휴머니즘적 패러다임에 갇힌 발상’이라며 코웃음 친다.

세상만사를 비관적으로 보는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는 사실 런던정경대학(LSE)에서 강의하는 한편 『가디언』지를 위시한 여러 매체에서 저술활동을 펼쳐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뉴라이트와 대처리즘의 싱크탱크(think tank)에서 활약하다가 시장 근본주의의 맹렬한 반대자로 변신하는 등 독특한 정치 이력을 갖고 있는 그는 정치행동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변통으로 본다. 휴머니즘을 향한 그의 비판도 기독교의 대항마에 불과했던 휴머니즘이 어느 순간 절대적 종교인 양 행세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휴머니즘은 세상의 중심인 인간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킨다는 기치를 내건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데는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깃들어있다. 또한 인간이 세계를 ‘진보’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자유의지’ 덕분이다. 여기서 휴머니스트들은 무한히 누적된 과학이 인간의 힘을 극대화해 진보를 돕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휴머니즘을 구성하는 인간 우월주의와 진보에 대한 희망을 비판한다. 먼저 다윈의 진화론을 인용해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을 반박한 그는 생물 종이 무작위로 상호작용해 만들어진 유전자 조합의 결과에 불과해 결국 인간은 다른 종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이렇게 ‘동물’에 불과한 인간은 과학을 통해 힘을 기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들에게 해를 끼치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변해간다. 탐욕스럽다는 뜻의 단어 ‘rapacious’를 넣어 현생 인류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패러디한 제목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는 인간의 탐욕적 속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노자의 도가 사상에서 ‘지푸라기 개’의 개념을 끌어와 휴머니즘의 대안을 제시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사 지낼 때 이 지푸라기 개를 사용하는데, 이 개는 제사 때는 숭배의 대상이지만 제사가 끝난 뒤에는 버려진다. 저자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도 언젠가는 자연의 섭리에 의해 지푸라기 개처럼 버려질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책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세계를 ‘흘러가는 대로 두라’고 충고한다.

시종일관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놓고 끝내는 세계를 흘러가는 대로 두라는 저자의 말은 일견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이 끊임없이 진보를 일구고 세상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주입된 통념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지 않고, 인간만이 진보를 이끌지 않아도 슬퍼할 이유는 없다. ‘어느 철학자의 사색록’인 이 책은 휴머니즘이라는 미로에 갇힌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출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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