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시를 통해 보는 나의 모습

▲ © 강동환 기자


내가 시를 즐기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하고나서 한참 후의 일이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시절 시를 ‘작업’에 필요한 소품 정도로 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필수품같이 되었다. 책방에 가면 시집 코너로 발길이 가고 신문의 광고나 서평에 난 시집들을 확인해 보고 싶어진다.

바쁜 척 시간없는 척 생활하는 틈 사이에서 시는 내게 안성맞춤이다. 짜투리 시간에 시 한편은 후루룩 읽어버릴 수 있다. 한 입에 순식간에 입속으로 감출 수 있는 길거리 간식 같다. 6천원에 60편, 한편에 100원이다. 입안에 물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씹어도 보고 냄새도 맡고 가글도 한다. 끓였다 식혔다 재탕 삼탕 계속해도 뽀얗게 우러나는 사골 한 조각 입속에 문 강아지가 된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나는 시에 골몰하고 있는 나 일 경우가 종종 있다. 작지만 밀도있는 시어들을 몸에 심고 있는 나,곧 잊지만 내 몸 어딘가에 남아 단단히 나를 지탱시켜 줄 재료들.

생활의 발견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내 처지와 공명하는 시 구절과 꼭 마주치게 된다. 지금의 내 마음과 맞아 떨어지는 시가 어쩌다 들르는 책방의 책꽂이에는 꼭 있다. ‘이런 행운이 어쩜 이토록 자주 일어나는가’라고 감탄하기에는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그런데 그건 내가 시를 많이 읽어서가 아니고 시가 본래 그렇기 때문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시는 원래 그런 거였다. 잘 익은 술이 그렇다든데, 시는 읽는 계절, 읽는 상황, 그때의 내 기분마다 매번 다른 맛을 흘려준다. 같은 시인데 오늘은 무척 시고 떫다. 그 시가 지난날 무척 매콤했으므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난 1987년에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8년, 귀국 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8년 반을 지냈다. 내 20대는 미국에서, 30대는 KAIST 캠퍼스가 있는 대전에서 보낸 셈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마주친 두 편의 시가 있다.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에서 만난 「노독」과 「명기」가 그것이다.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명기(明器)」// 나는 고생해서 늦게/ 아주 늦게/ 가고 싶다/ 가장 오래 된 길에 들어// 저승 가서 사용할 이쁜 그릇들, 명기/ 이승 밖에서/ 무덤 안쪽에서 오래/ 써야 할 집기들/ 사람은 돌아가고 미래는 돌아온다/ 사람은 미래의 작은 부장품/ 나의 부장품일 이 느슨한 고생/ 이 오래 된 미래 이 두 편의 시들을 만난 즈음에 ‘나는 모교로 돌아오면 어떨까’ 라는 생각에 뒤척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시였다. 뜨거웠지만 서툴렀고 집중했지만 편협해져가던 내게 쏟아진 최면이었다.

변덕이 그리는 무늬, 그 위를 쓸고 다니는 내 생활의 빗자루들, 그 때마다 나는 시를 통해서 나의 모습을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시인들은 내가 어떤 맛으로 그 시들을 내 몸에 품고 있게 될 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는 나를 반추시켜주는 최면이고 나는 늘 빠져든다. 예외가 없다.

이광근 공대교수 전기컴퓨터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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