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거장, 거장을 만나다
구스타프 말러: 오스트리아 출생. 살아있는 동안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유명했으나 사후에는 후기 낭만파 작곡가로 더 잘 알려졌다. 노래가 들어가지 않는 교향곡을 노래가 담긴 가곡처럼 작곡했으며 각곡을 음량, 음색, 규모 면에서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교향곡처럼 작곡한 것이 말러 음악의 특징이다. 대표작은 「한탄의 노래(1880),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1885) 「대지의 노래(1911) 등.
교향곡「대지의 노래」: 말러가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인생에 대한 한없는 애착을 중국의 시를 빌려 노래한 곡. 이백(李白)의 시를 바탕으로 빠르고 무겁게 진행되는 1악장, 가곡과 구성이 유사한 2악장, 되돌리고 싶은 청춘의 싱그러움을 그린 3악장, 서정적인 음률의 4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말러의 세계관을 교향곡과 가곡, 서양과 동양 등 서로 다른 양식으로 담아내 주목받은 작품.
장 주네: 프랑스 출생.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시인,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다채로운 언어와 문체로 성(聖)과 악(惡)에 대한 기존 관념의 전복을 시도했다. 부랑자, 거지, 도둑으로 삶의 밑바닥을 전전하자 교도소에 수감 돼 있는 동안 시「사형수」(1952)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은 희곡「발코니」(1956),「하녀들」(1947), 소설「도둑일기」(1949) 등.
연극「하녀들」: 주인마담의 생활을 동경하는 하녀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희곡. 하녀 언니 쏠랑쥬, 하녀 동생 끌레르, 주인마담 등이 주인공. 쏠랑쥬와 끌레르의 욕망은 역할극을 통해 마담을 흉내내며 극에 달한다. 이들은 마담의 애인 무슈를 곤경에 빠뜨리지만 계획이 실패하자 마담을 살해하려 든다. 하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역할극에서 마담이 된 끌레르는 약물을 마시고 죽어간다.
장 주네(주네): (말러의 곁으로 다가가며)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입니까?
구스타프 말러(말러): 그렇지 않네. 멋진 공연이었어. 다만 「하녀들」에 배인 씁쓸함이 공연이 끝나고도 잘 떨쳐지지 않더군.
주네: 그런가요? 제가 하녀들을 통해 그려내고자 한 현실이 선생님에겐 씁쓸하게 느껴지셨나 보군요.
말러: 그렇네. 하녀 쏠랑쥬와 끌레르가 자신들을 억압하는 주인마담을 동경하는 모습이나 신분 상승의 욕망을 실현하려다 결국 파멸하는 모습이 우리네 현실이자 진실인 것 같아 더욱 그러하더군. 그런데 자네의 삶 역시 하녀들과 같은 하류계급의 삶이었다 할 수 있지 않나.
주네: 정곡을 찌르시니 부정할 수가 없군요. 저는 어릴 적부터 소년 감호소에 수감되기를 반복했습니다. 자라서도 거리를 부랑하다 물건을 훔쳐 수없이 감호소를 들락거렸고 그곳에서 나오고자 지원한 군대에서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망쳐 나왔었죠.
말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군. 그런데 자네의 과거가 어떠하든 자네는 글재주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지 않았나. 그리고 사르트르와 같은 지성인들에게 찬사를 받기도 했고 ‘글 쓰는 도둑’, ‘문학적 식견과 재능이 뛰어난 탈영병’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으니 참 아이러니하지. 그러고 보니 하녀이지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끌레르와 자네가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주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작품의 배경인 프랑스 사회에선 하녀처럼 지배당하는 자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끌레르의 능력은 그녀를 하녀의 삶도 지배 계층의 삶도 아닌 주변인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마담의 삶을 꿈꾸던 끌레르가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것 역시 이런 주변인적 삶 속에서 방황하며 뒤틀린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고요. 가진 것은 글 재주뿐인 저의 삶처럼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제 작품을 보고 저의 삶을 떠올리셨듯 「대지의 노래」에도 선생님의 삶이 담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러: 다 지난 일이지만 당시를 떠올리니 마음이 편치 않군. 「대지의 노래」를 작곡할 당시 나는 빈 궁정 오페라극장의 감독직에서 해임당했지. 게다가 큰딸 마리아를 가슴에 묻어야만 했어. 디프테리아에 걸린 마리아는 제대로 된 항생제도 없던 시절에 수술을 받다 유명을 달리했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그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군.
주네: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던 시기였군요. 당시 심장병도 앓으셨다죠. 「대지의 노래」 1악장 ‘현세(現世)의 고통을 토로한 권주가’에서 반복되는 ‘삶은 어둡고 죽음 또한 그러하다’라는 가사는 당시 선생님의 심경을 이야기하는 것이네요.
말러: 자네가 이 부분을 듣고 나의 고뇌를 읽어냈으리라 짐작했지. 연주 속에서도 삶의 고통이 드러났을 게야. 오케스트라의 간주곡이 곡의 시작을 알리면 삶의 부질없음과 죽음을 개탄하는 가사가 담긴 선율이 점차 격정적으로 무대 위에 울려 퍼지지. 이어 트롬본은 삶의 문을 세차게 닫는 듯 둔탁한 저음을 내뱉고 말이야. 곧 삶의 문을 닫게 될 내 처지를 표현했달까.
주네: 저 역시 하녀들이 가진 마담에 대한 동경과 마담이 되고픈 욕망을 표현하고자 화려한 샹들리에의 반짝임과 거울의 반사 빛만이 존재하는 어두운 배경을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극 중에서 현실과 연극놀이를 혼동하는 하녀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그리고자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죠. 선생님의 작품에선 동양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더군요. 선생님의 작품 「대지의 노래」가 중국 시인 이백의 시를 토대로 만든 곡이란 말이 사실입니까?
말러: 그렇네. 동양적 느낌을 담아낸 곡이지. 6악장 ‘작별의 아리아’ 부분에서는 만돌린 소리가 동양의 비파 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플루트의 저음이 갈대피리 소리처럼 속삭이지. 특히 6악장에서는 저음부터 고음까지 음을 꽉 채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 사이에 공백을 뒀어. 마치 동양화에서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것처럼.
주네: 독특한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순환구조를 갖는 부조리극의 전형에서 벗어나 액자식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하녀들이 마담행세를 하는 놀이는 극 중의 극, 즉 액자의 속이죠. 연극놀이가 끝나고 다시 마담에게 순종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극 중 현실은 액자의 틀이 됩니다.
말러: 자네 말을 들으니 내가 극이 끝난 후에도 씁쓸함을 떨치지 못했던 이유를 알겠네. 마담에게 약물을 먹여 죽이려던 현실의 계획이 실패하자 현실과 놀이 사이를 헤매던 끌레르가 놀이 속에서 마담 역할을 맡은 자신에게 그 계획을 실행하지. 결국 끌레르의 비극을 액자식 구조를 통해 더욱 비참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었군.
주네: 액자식 구조를 사용한 제 의도를 파악해 내셨군요. 그런데 극의 결말을 이야기하다 보니 끝내 약물을 마시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끌레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방황하던 제 삶이 그녀에게 겹쳐지는군요. 갑자기 제 삶의 결말은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말러: 나 역시 내 작품의 마지막에 C 단조를 이용해 음울한 장례식의 분위기를 담아냈지. 예술에 담아낸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면 그 결말 역시 우리의 삶과 닮아있을지 궁금해지는군그래.
최신혜 기자
choish14@snu.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