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다시 한 번 리플레이』

다시 한 번 리플레이
켄 그림우드 지음┃
공보경 옮김┃노블마인┃452쪽┃1만2천원

많은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SF에 매혹된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는 기존 관념을 해체하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나는 여자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왜 남자들보다 SF에 시큰둥한지는 모른다. 여자들이 상대적으로 기계나 과학보다는 감성적인 이야기에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남자들보다 조숙한 성향이 있어 허황한 이야기에 대해 무심하기 때문이리라.

남자들도 나이가 들면서 대개 SF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증상이 심해져 간다. SF마니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누군가 추천하는 SF책이라면 반드시 사보고, 새로 나온 영화가 SF장르라면 어지간한 악평이 있기 전까지는 극장에 가고 싶어 몸살을 앓는다. SF의 예상치 못한 상상력과 의외의 이야기에 내가 매혹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경우는 그 속에서 철학과 인생을 만날 때이다. 사실 나는 SF처럼 철학적인 장르는 없다고 믿는다. 아서 클라크나 필립 K. 딕 같은 뛰어난 SF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반드시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 속에서 ‘생의 의미’, ‘시간의 비밀’ 그리고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풀 수 없는 문제들과 마주치며 그 때마다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그런데 어째서 SF는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자주 철학적인 질문과 마주치게 할까.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나는 ‘철학’이란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SF는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통해서, 협소한 일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축조해 놓은 개개인의 철학과 세계관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드러낸다. 우리의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리고 인간의 정체는 익숙한 세계에서 얻은 경험이 아니라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장 낯선 이야기에 의해 오히려 더 철저하게 해명될 수 있다.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켄 그림우드의 SF 소설 『다시 한 번 리플레이(리플레이)』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당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당신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그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러한 과정은 반복된다.” ‘시간의 순환’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소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아이디어를 토대로 한 영화와 소설의 제목을 열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얼핏 떠올려 보아도 독일에서 대단한 관객을 모은 영화 「롤라 런」(1999)이나, 빌 머레이가 호연했던 「사랑의 블랙홀」(1992)이 떠오른다. 그런 영화와 소설이 쏟아져 나온 때가 『리플레이』가 발간된 1986년 이후라는 것으로 추측해보면 이 책이 아마도 그러한 유행에 영향을 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문학적 향기와는 거리가 멀다. ‘인생이 리플레이 된다’는 아이디어도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뻔한 이야기가 될 뻔했다. 이 글이 ‘스포일러’가 돼서는 안 되겠기에 세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림우드는 ‘인생이 리플레이 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이용해 주인공 제프 윈스톤의 삶을 반복시키되, 그 과정에 적절한 변주를 끼워 넣어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두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삶과 시간, 심지어 사랑에 대한 성찰로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반복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계속해서 리플레이 되는 삶을 살아낼 때마다 이전 삶에서 하지 못했거나 후회했던 무언가를 극복하고자 매번 노력하는 주인공. 그러나 그는 끝내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그의 삶과 그 불가해한 삶의 동반자를 보면서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플레이되지 않는(적어도 아직은 리플레이 되고 있지 않은) 내 변변치 못한 삶을 자꾸만 돌아봤다. 나는 ‘인생은 한번뿐’이니 하는 식상한 말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인생이 한번인 것은 맞지만, 생각보다 짧지 않다. 그리고 그 삶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그 반복되는 삶이라는 것이 ‘무한 반복’이라 어떤 의미에서는 출구 없는 지옥일 뿐이며, ‘유한 반복’이라면, 좀 더 많은 기회일 뿐이다.

삶은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되, 모든 욕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무엇이나 그렇듯이 우리는 어정쩡한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생을 잘 살아내는 비법은 따로 있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삶의 방책은 유일하다. 자신의 욕망을 냉정하게 직시한 후 버릴 것과 버리지 못할 것을 선별하고, 주어진 기회와 자원을 버리지 못할 욕망들에 최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절대로 자신이 원하는 최적의 배분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조광희 변호사
영화제작사 '봄' 대표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삶을 어찌어찌 이끌어가기도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당신의 비석에 어떤 미사여구가 새겨지든 당신의 관에는 “잘해보려 했으나, 아주 잘하지는 못한 어떤 인생”이라고 쓰이게 될 것이다. 나는 인생의 반환점을 돈 지금에 와서는 삶에서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삶이란 ‘미지근한 물’과 같이 지리멸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누군가 삶의 목표가 무어냐고 물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무병장수’라고 말하면서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면 무심결에 ‘생을 리플레이할 수 있다면’하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지리멸렬한 인생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리플레이를 원하는 인생은 용서받을 수 없다. 내 삶은 아마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리플레이는 안 된다. 나는 그 모든 괴로움과 번민과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이 삶이, 이 인간이 조금만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