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누구나 살아가면서 스쳐간 특별한 인연을 가슴에 묻어두고 추억한다. 한때 그 인연으로 괴로워했던 이도 지나간 시간을 끊임없이 곱씹는 ‘기억’의 과정을 거치면 아팠던 과거와 화해할 수 있게 된다. ‘기억’은 과거에 얽매인 소모적인 행동이 아니라, 어그러진 관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를 채워나가는 일종의 의식이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이러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작가 권여선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등단작 『푸르른 틈새』부터 수작으로 손꼽히는 『분홍 리본의 시절』까지 그녀가 그간 골몰한 주제는 사람간의 ‘관계’다. 지난 2년간 하나둘씩 풀어놓은 단편들을 갈무리한 이번 책에도 이런 고민이 녹아있다. 특이한 점은 관계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그녀가 제시하는 방법 역시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 수록된 일곱 작품은 모두 주인공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표제작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는 과거에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관계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복원된다. 대학 새내기인 ‘나’는 어딘가 삐딱한 ‘P형’에게 애매모호한 호감이 가지만 그의 조소에 상처받아 그와 멀어진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만난 친구 ‘현수’는 그것이 P형 특유의 농담이었고, 삐딱했던 것은 오히려 P형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음을 알려준다. 아픈 기억과 마주할 수 있게 된 ‘나’는 과거 자신을 용서하며 뒤늦게 첫사랑을 완성한다.

그런가 하면 2008년 이상문학상수상작  「사랑을 믿다」는 6년 시차를 두고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는 두 남녀의 희한한 실연담이다. 오랜만에 ‘그녀’와 만난 ‘나’는 그녀의 기억을 통해 그녀가 과거에 자신을 좋아했으나 이제 더는 사랑을 믿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실연 직후 방문한 큰 고모 댁에서 자신보다 더 불행한 세 여인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의 고통을 초월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뒤늦게 얻은 실연이 오래 갈 것을 예감하면서도, 일상의 ‘보잘 것 없는’ 위로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살아가게 하리라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렇게 기억을 되짚어보며 누군가는 사랑했던 이와의 오해를 풀고, 또다른 누군가는 삶의 교훈을 얻는다. 작품 곳곳에 뿌려놓은 “그 시간이 다시 온다면”, “하지만 그때 말이다”와 같은 가정이 이뤄질 수 없을지언정 결코 공허하지 않은 이유다. 과거에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던 사소한 일들은 ‘기억’을 통해 하나의 진실로, 나아가 삶에 대한 통찰로 승화된다. 일그러진 채 끝난 줄 알았던 스무살의 풋사랑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 비로소 완성됐던 것처럼.

한때 우리를 스쳐간 인연이 아픔과 좌절을 남겨도 ‘기억’은 이 강렬함을 부드럽고 깊은 맛으로 삭혀낸다. 극적인 전개 없이 주인공의 회상과 독백으로 가득한 권여선의 작품이 끝내는 독자를 먹먹하게 만드는 이유다. 차미령 문학평론가의 입을 빌리자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격”이요, “좋은 소설에만 가능한 자질”이다. 지금 과거의 상처로 괴롭다면 그 기억마저 끌어안으라. 그것으로 우리는 성숙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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