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동계올림픽 5위, 남아공 월드컵 16강 등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내년 하반기에도 대구에서 세계 육상선수권 개최가 예정돼 있는 등 한국은 더이상 세계 스포츠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하지만 화려한 성과들에 가려져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한국 체육계의 어두운 면이 있다. 미래의 박지성, 김연아를 꿈꾸는 한국의 학생선수들은 학습권을 박탈당하고 폭력에 상습적으로 노출되는 등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 채 혹독한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학신문』에서는 중·고등학교 학생선수들의 인권 실태를 살펴보고 그 원인과 해결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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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한국의 중·고교 학생선수들은 유년시절부터 학교 운동부에 들어가 일반학생들과 분리돼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운동부에 관행처럼 내려오는 폭력과 입시제도의 구조적 모순때문에 학생으로서 누려야 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폭력에 노출되는 학생선수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생은 축구부에 속해 있던 중학교 재학 시절 학교에 가는 하루하루가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시합에서 졌다’, ‘숙소생활을 잘 못한다’ 등의 이유로 코치 또는 선배들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선배들이 날카로운 옷걸이나 야구방망이로 신체를 심하게 때리는 날도 있었다. 그는 “운동은 맞으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운동부에서 당하는 폭력이 너무나도 부당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며 “특히 숙소생활을 하면서 선배들과 코치들로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구타를 당했을 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일(수) 발표된 대한체육회의 ‘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고등학교 학생선수들 가운데 54.1%가 심리적 폭력, 가혹행위 등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구타 후 대처 방법에 대해 중학생의 49.9%, 고등학생의 61.2%는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하는 등 학생선수들은 폭행을 당하고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지도자들의 58.9%는 폭력이 발생한 이유로 ‘정신력이 해이해졌기 때문에’라는 자의적인 이유를 꼽았다.

이처럼 학생선수들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이유로는 체육계에 깊이 뿌리내린 권위주의를 들 수 있다. 실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체벌은 물론 폭력도 불가피하다는 시각과 선후배, 사제관계에서 철저한 명령 복종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학교 운동부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학생선수들은 훈련하는 과정에서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이를 고발할 경우 입시나 진로 등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불이익을 두려워해 신고를 꺼리기도 한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신순갑 사무총장는 “체육 현장에서 코치들은 전권을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학생선수들은 폭행을 당해도 이에 침묵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코치나 감독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운동부 문화가 사라지지 않으면 학생선수들에 대한 폭행 문제는 쉽게 해소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학생선수에게 행해지는 폭행을 해결하려면 실효성이 있는 학생선수 인권 지침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인권 지침은 체육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폭행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 그리고 폭력 예방교육의 정례화 방침 등을 제시하는 것을 지칭한다. 김상범 교수(중앙대 사회체육학과)는 “실제 현장에서 지침이 지켜지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책과 홍보, 교육 등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도적 장치뿐만 아니라 체육 현장 주체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호주는 호주체육회를 설치해 학생선수들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감시하는 스포츠 모니터링 프로그램(Good Sport Monitor)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학생선수, 학부모, 지도자, 행정가 등이 협력해 체육현장에서 서로 행동을 감시하고 규제하도록 하고 있다. 인권에 기초한 스포츠 문화의 형성을 위해 스포츠 현장 주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학업과 유리된 채 살아가는 학생선수들

경기 삼일공업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김기훈(19)씨는 “수업시간이 되면 늘 졸리고 지루하다”고 말했다. 테니스부에 소속된 김씨는 수업 일자의 절반 정도는 훈련을 하느라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공부는 손을 놓았기 때문에 성적은 늘 최하위권을 맴돈다. 김씨는 “대학하려면 테니스만 잘하면 된다”며 “수업 내용이 대부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별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같이 학생선수들은 훈련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운동선수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생선수들의 정규수업 참여시간은 시합이 있으면 하루 평균 2시간, 없으면 4.4시간뿐이며 이에 대한 보충수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선수들의 성적 저하도 심각하다. 체육과학연구원에서 2008년 발표한 ‘학생선수의 학업활동 실태조사 및 최저학력제 도입 타당성 연구’에 따르면 중·고교 학생선수 1만8천86명의 성적 평균석차가 전체 학생 100명 중 80등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많은 대학의 체육관련 전공 모집 제도는 체육특기자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최저학력 없이 그저 ‘체육 특기’만 있으면 대학 진학이 가능한 것이다. 체육특기자제도가 시행되면서 일선 학교들은 대학 진학 성과를 위해 학생 선수들에게 수업보다 운동 훈련 시간을 더 많이 배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학생선수가 어쩔 수 없이 운동을 그만둘 경우 떠안아야 할 부담을 가중시키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서울 경신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명진(19)씨는 오랜 운동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골절이 일어나 정강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복귀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아 운동을 그만두게 됐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 김씨는 기본지식이 부족해 초등학교 진도부터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영어 시험을 보면 지문 하나 해석하지 못해 답답하고 두려웠다”며 “기초가 안 된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도 진학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학생선수들의 학습권 박탈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입시제도 개선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정준영 교수(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는 “체육특기자 제도는 필연적으로 학생들이 운동에만 몰두하도록 함으로써 선수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동 이외의 학습 기회를 뺏는다"며 “궁극적으로는 체육을 잘하는 학생에게 일정 수준의 가산점만 부여하는 방향으로 대학 입시가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근 체육계에는 체육특기자제도의 병폐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대학 진학 시 최저학력 반영이 논의되고 있다. 또 올해 5월 정부는 ‘선진형 학교운동부 운영 시스템 구축계획’을 발표해 앞으로는 최저학력기준에 미달한 학생선수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체육단체 등에서 개최하는 각종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학생선수들의 체육활동에서 아마추어 정신을 철저히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고등학교체육연맹(NFHS)과 미국대학체육연맹(NCAA)에서는 선수자격에서부터 학습능력을 매우 중요한 평가요소로 제시하고 있다. 일정 수준의 학업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은 선수로서의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세계최고수준의 기량을 갖춘 선수들을 지도하는 IMG 아카데미는 정규 훈련 프로그램 외에 저녁때 튜터링에 참여하고 주당 4번의 자율학습에 참여하는 것을 필수로 하고 있다.

'학생인 선수'가 아닌 '선수인 학생'으로

학생선수들은 일반 학생들과 철저히 분리된 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이에 학생선수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선수이기 이전에 청소년인 학생선수들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학생선수는 ‘일반학생과 다른 특수한 존재’라는 인식으로부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희준 교수(동아대 생활체육학과)는 “학생선수들 역시 성장기 청소년들로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라며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 체육계는 특정 운동을 잘하는 학생을 조기에 발굴해 그 운동만을 시키는 체계가 좋은 성적을 내는 데 효율적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있다. 하지만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학생선수들의 인권은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었다. 류태호 교수(고려대 체육교육과)는 “현재의 체육 문화 속에서 학생선수들은 운동능력을 최대로 높여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운동 이외의 모든 삶을 제쳐 놓아야 하는 현실에 갇혀 있다”며 “프로선수가 아닌 학생선수라면 기본적인 인권과 미래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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