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을 시작으로 애틀랜타올림픽, 아테네올림픽에서 각각 은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효자종목’으로 자리 잡은 여자 핸드볼의 중심에는 현 서울시청 핸드볼팀 임오경 감독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도 속으로 삭이고 이겨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모든 것을 걸고 운동에 매진해야 했던 선수 생활은 지금의 그를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삶에 있어서 일종의 굴레와도 같았던 것이다. 『대학신문』은 치열했던 선수생활을 마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임오경 감독을 만나 그의 지난 선수 생활과 현재 한국 스포츠계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느 선수들처럼 임오경 감독에게도 훈련 과정은 혹독하기만 했다. 치아가 부러지는 일은 예사였고 무릎인대가 늘어나 수술실에 들어가기도 수차례였던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에 시작한 핸드볼로 지금은 몸에 성한 곳이 없다”며 “사고로 다친 경우뿐 아니라 선배나 코치가 운동에 집중하라며 가한 폭행은 학생선수 시절 선수 생활 자체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게 했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서의 합숙생활이 마치 ‘돼지우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는 그의 농담 섞인 말은 당시의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도 그는 한번 시작한 운동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는 “운동을 시작한 선수들은 현실적으로 다른 길을 생각하기 어렵다”며 “직업선수에게 성적은 밥줄과 같기 때문에 끊임없이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1년 단위로 팀에 소속 여부가 결정되는 현실은 임오경 감독의 선수 시절 ‘성적’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여성 선수였기 때문에 그는 출산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임신 7개월까지 경기를 뛰었고 출산 후에는 2주 후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며 “몸이 지치고 피곤해 고통스러웠지만 운동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임 감독을 둘러싼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지만 그는 핸드볼 선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남다른 재능으로 일본 핸드볼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지난 1994년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2008년 일본에서의 선수활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임 감독은 여전히 폭력이 만연한 현실에 낙담했다. 특히 높은 성적을 위해 혹사당하는 학생선수들의 인권실태는 열악하기만 했다. 그는 “한국 체육을 이끌어나갈 체육 꿈나무들이 폭력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며 “성적 때문에 학생선수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해결하려면 ‘목숨을 건 좋은 성적’을 강요하는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한국 스포츠계의 화두는 ‘경기 성적’이다. 다음 달 열리는 전국체육대회 앞둔 임오경 감독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임 감독은 지도자로서 언젠가 한국 스포츠를 위해 ‘희망의 슛’을 던지겠다고 말했다. 한국 체육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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