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국어 시간의 사전 찾기 수업을 기억하는가. ‘잠자리’를 찾으려면 책 옆면에서 ‘지읒’ 부분을 편 뒤 모음 ‘아’가 오는 부분으로 넘어가고, 뒤이어 받침 ‘미음’을 찾아간다. 팔락거리는 책장과 깨알같이 정돈된 글씨로 어린 마음을 설레게 했던 국어사전이, 이제 위기를 맞이했다. 출판계에서 사전이 시장성을 잃고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사전이 정의의 모든 것이었던 시대는 가고, 기존 사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新)사전’들이 줄지어 출간되고 있다. 이에 『대학신문』은 정의(definition)의 새로운 길, 의미의 정의(justice) 구현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책과 그들의 시도가 가지는 의미, 그리고 사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봤다.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현상 하나. ‘심심하다’에 대한 두 가지 정의가 있다. 하나는 ‘시간 보내기가 지루하고 재미가 없음’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천진한 상태의, 아이의 외로움’이다. 전자는 『민중국어사전』의 정의, 후자는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이 내린 정의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쪽의 ‘심심함’에 더 이끌리는가? 날씨가 서늘해지며 사람과의 따뜻한 교감이 그리워지는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딱딱한 첫번째 정의보다는 아마 감성적인 두번째 정의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현상 둘. 집집마다 서가에 꽂혀있던 두툼한 종이사전이 교양의 상징이던 시대는 갔다. 요즘은 단어의 뜻을 알고 싶으면 종이사전을 펼쳐들기보다는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린다. 게다가 지난 1월엔 국내 사전출판계를 주도하던 금성출판사가, 작년에는 시사출판사와 교학사가 사전출판팀을 없앴다. 유일하게 사전출판팀을 가지고 있는 민중서림마저 94년 이후 출판등록 1호 국어사전인 『이희승 국어대사전』의 개정 증보판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전적 정의와는 다른 참신한 정의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증가하고 있는 반면 기존 종이사전은 실제 사용법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단어의 다양한 뜻, 그리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새로 생겨난 단어를 곧장 반영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아날로그적인 사전 체계와 그것의 권위적인 정의는 더이상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지 못해 점점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통 사전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 독특한 사전들과 다수의 지성이 모여 만드는 웹사전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다른 한켠에서는 정통 사전을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 역시 활발하다. 새로운 정의(definition) 구현을 위한 움직임들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정의, 전문성을 만나 더 깊어지다

단어들은 그것을 둘러싼 컨텍스트(context), 즉 시대 상황과 공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시민’의 정의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외국인이 아닌 자유민 성인 남성’으로 제한적이었지만 중세 유럽, 현대를 거치며 ‘성별, 연령 등 제한 없이 국가 구성원인 모든 사람’으로 탈바꿈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 같은 단어라도 학자나 학파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학술 영역의 산전들은 단어의 가장 대표적인 뜻에서 벗어나  개념어의 다층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어 행보가 주목된다.

최근 발간된 『좌우파 사전』(구갑우 등), 『경제 개념어 사전』(곽수종), 『철학 개념어 사전』(채석용), 『역사 잡학사전』(앤털 패러디) 등 각종 ‘사전’들은 각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개념어를 저자만의 언어로 정의하고 사회 및 학문 분야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다. 예를 들어 『좌우파 사전』은 하나의 개념어를 두고도 좌파와 우파가 서로 상이하게 인식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즉 우리나라의 고질적, 소모적 이념 논쟁은 좌우간의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음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고, ‘남북정상회담’, ‘민영화’, ‘다문화주의’ 등의 개념에 대한 좌우파 양 진영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이렇듯 『좌우파 사전』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두 진영의 대립적인 시선을 조명한다. 반면 남경태의 『개념어사전』은 사전 속에서 한 줄짜리 단편적인 텍스트에 그쳤던 단어의 의미를 자유연상에서 비롯된 이미지로 해방시킨다. 저자는 기존 사전 형식을 빌려 ‘가상현실’부터 ‘홀로코스트’까지 인문학 개념어들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남경태씨는 “단어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컨텍스트(context)”라면서 “‘참조하는 사전’이 아닌 재미있게 ‘읽는 사전’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딱딱한 인문사회 개념어를 자유연상을 통해 그려내는 저자만의 ‘주관적 정의’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에 『개념어사전』은 지금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또 표제어를 선정하는 방식 또한 정의를 새롭게 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137억년의 역사를 패러디한다’고 선언하는 앤털 패러디의 『역사 잡학사전』의 경우 소변, 피임약, 살인 도구 등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키워드에 초점을 맞춘 백과사전이다. 예를 들어 ‘영어’라는 키워드에서는 지금 사용되고 있는 표준 영어의 기원을 다룬다. 영국에서 1477년 최초의 책을 출판할 때 지역마다 다양한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가지 방언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것이 굳어져 표준 영어가 됐다는 것이다. 또 ‘치약’이라는 키워드에서는 고대 로마인들이 소변으로 이를 닦았다는 다소 엽기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친숙한 단어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적 맥락과 독특한 의미를 소개하고 있다.

개똥철학? 나만의 사전!

사람은 누구나 사랑이나 인생에 대한 ‘개똥철학’을 가지고 있다.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특정 대상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담긴 사전을 가진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처럼 학술적, 전문적인 영역의 개념 정의 시도 외에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어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주목받고 있다.

올해 여름 나란히 출간된 『불법사전』(정철)과 『악마의 백과사전』(박광수)은 정식 사전도 아니고 학문적인 내용을 다룬 서적도 아니다. 하지만 경직된 표준 정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카툰 에세이 『광수생각』으로 유명한 박광수는 ‘국어사전’이 상징하는 사회적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도전하고자 『악마의 백과사전』을 썼다고 말한다. 그가 정의하는 ‘술집’은 ‘인생이라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 때, 단번에 오를 수 없음을 안 선각자들이 요소요소에 설치해 놓은 베이스캠프’다. 한편 한국을 대표하는 카피라이터로 활동해온 정철은 ‘시험’, ‘사랑’, ‘먹다’ 등 얼핏 평범해 보이는 120개의 단어에서 기존 ‘합법사전’의 정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 『불법사전』으로 엮어냈다.

그런가 하면 시인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와 예민한 감각으로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에 관련된 단어들을 정의하는 이도 있다. 『마음사전』의 저자 김소연 시인은 “마음의 결들에 비해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한없이 불충분하다”며 마음과 관련된 단어들을 시인의 눈으로 재발견했다. 애잔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사전을 읽노라면 마음속 복잡했던 감정이 정리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존심’은 ‘차곡차곡 받은 상처를 밑천’으로 해서 ‘어차피 모든 걸 예감했던 듯 독해지는 마음’이며 ‘자존감’은 ‘차곡차곡 받은 애정을 밑천’으로 해서 ‘세상이 독하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닫는 마음’이라고 비교해 풀이하는 식이다.

웹사전에 쌓여가는 누리꾼들의 정의

자신만의 정의를 담은 ‘사전’ 형식의 출판물을 통해 정의의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 외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활발한 소통으로 정의를 만드는 웹사전이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2001년 비영리 단체에 의해 시작돼 수억명의 네티즌이 만들어가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가 있다.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표제어 항목을 편집할 수 있으며 집필자들 간의 활발한 피드백이 가능해 수시로 업데이트가 되고 있다. 전 세계 네티즌의 ‘즐겨찾기’가 된지 오래인 위키피디아는 2004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에 따르면 이미 유구한 전통과 학술적 권위를 자랑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위상을 압도한다.

우리나라의 국립국어원도 2008년 한글날부터 표준국어대사전 온라인 서비스를 개통했다. 또 2012년에는 위키피디아와 같이 누리꾼들이 직접 참여하는 웹사전 형식을 채택하고 생활용어, 방언, 전문용어 등 표준국어대사전에 있지 않은 50만개의 단어를 더한 ‘개방형 한국어지식대사전(가명)’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한다. 지난달 27일까지 정식 명칭을 공모하는 등 벌써부터 일반 사용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려는 의지를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위기의 사전, 변신을 꿈꾼다
위와 같이 정의의 권위화를 뒤집는 새로운 시도는 매우 값지지만 기존 사전의 역할이 그에 밀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변화의 바람은 기존 사전 또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고 발전하도록 이끌고 있다. 사전학계는 사전의 새로운 역할과 가치를 모색하고 사전은 이를 바탕으로 지식 전달 위주였던 딱딱한 사전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전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사전학 전문가인 정영국 교수(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영어교재개발학과)는 “사전학은 사용자에게 사전을 통해 어떤 정보를 전달해야 하나, 또 잘못된 것은 어떻게 수정할지 고민한다”며 “앞으로의 사전은 단어의 쓰임을 규정하는 권위적인 자리에서 내려와 실제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설명하는 사전으로 변화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을 고르고 난 뒤의 찌꺼기 물건’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허접쓰레기’의 정확한 표준 어휘는 ‘허섭쓰레기’로, 사전의 정보와 실제 활용법이 일치하지 않아 문제로 지적된다. 이처럼 실제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사전이 맞춰가야 하는가, 아니면 사전의 표준 정보를 기준으로 언중(言衆)이 맞춰가야 하는가는 정통 사전이 당면한 또 다른 과제이다.

사전의 변신을 꾀하는 사전계의 움직임은 기발한 신조어나 생생한 언어 사용을 담은 사전의 출판으로 실체화되기도 한다. 이상섭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1998년 지식 전달 중심의 사전에서 벗어나 실생활 중심의 생생한 국어사전인 『연세 한국어 사전』을 펴냈다. 또 2007년 출간된 국립국어원의 『사전에 없는 말: 신조어』는 2002년 이후 생겨난 새말을 담고 있어 표준 사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뿐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생각과 문화를 읽는 길잡이가 된다. ‘취집’, ‘역유학파’, ‘듀크족’ 등 사회 풍토를 담은 신조어들은 물론 ‘무지개주’, ‘물총주’, ‘드라큐라주’ 등 갖가지 폭탄주의 종류와 제조법도 사전의 표제어로 당당하게 자리했다.

사전의 위기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오히려 사전의 변신기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사전이 미처 짚지 못하는 곳까지 다루려는 새로운 시도들, 그리고 사전 자체를 시대 흐름에 맞게 혁신하려는 노력이 어우러져 정의(定義)의 정의가 다시금 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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