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사전』의 저자 정철의 '정의'를 듣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한 한명숙 후보 진영의 대표 슬로건은 ‘사람특별시’로, 한 후보의 인생역경과 서울 시민의 복지, 행복을 추구하는 그의 공약들을 한 단어로 표현했다. 이 슬로건을 쓴 이는 대한민국 대표 카피라이터 정철씨다. 지난 26년 간 여러 유명 브랜드의 카피를 써 온 그가 최근 ‘합법정의’에 도전하는 자신만의 ‘불법정의’들을 사전 형식으로 모아 『내 머리 사용법』, 『불법사전』 등의 책으로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카피라이터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저자의 ‘정의관’과 그의 ‘사전활용법’을 듣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람은 저마다 경험과 생각이 다르기에 같은 단어라도 다르게 인식하며, 모든 단어는 어떤 사람과 접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그래서 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합법사전’과 정철의 ‘불법사전’에서의 정의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정철씨는 ‘고정관념’을 ‘고장관념, 즉 관념이 고장 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는 책에서 저자만의 시각에서 단어를 정의내리고 거기에 동의어, 파생어, 용례까지 덧붙여 단어의 숨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치다’의 파생어인 ‘미친년’을 ‘안식년이 주어지기 전 일에 몰두하는 몇 해’라는 의미에서 ‘안식년’의 반대말로 정의내리는 식이다.

사실 카피라이터라는 정씨의 직업과 『내 머리 사용법』, 『불법사전』 등 새로운 정의를 써내려가는 글쓰기 작업이 관련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카피라이팅이 브랜드의 추상적인 컨셉을 한 단어로 압축하는 과정이라면, 정의(定義)는 반대로 한 단어에 압축된 뜻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카피를 쓰는 과정은 정의를 세우는 과정을 반대로 되돌린 것이므로 결국 같은 범주의 작업인 셈이다.

그렇다면 카피라이터 정씨의 정의관은 무엇일까. 그에게 ‘정의’란 ‘건방진 것’이다. 그는 “단어에는 무궁한 뜻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로 못 박는다는 생각이 ‘건방지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건방진’ 정의관에는 단어의 정의를 한 가지로 표준화하면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념을 옹호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예를 들어 표준대사전에 ‘종교적·과학적 견지에서 망령되다고 생각되는 믿음’이라고 정의된 ‘미신’을 그는 ‘믿는 사람들 중에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등 힘 있는 사람의 수가 충분하지 못해 아직 종교로 인정받지 못한 비공식 종교’라며 도발적으로 재정의한다. 신도 집단의 사회적 영향력에 따라 어떤 믿음은 엄연한 ‘종교’가 되고 어떤 믿음은 ‘미신’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만의 ‘불법적’ 정의를 펼치기 위해 사전 형식을 택한 정씨는, 규정된 정의를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않는다면 사전은 세상의 무수한 말과 생각을 담고 있기에 아이디어의 보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전을 항상 옆에 두고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는 아이디

어를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할 때 아이디어 노트로서 활용한다”고 한다. 사전 예찬론자인 그는 북한어 사전과 백과사전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사전을 사용하기도 한다.

정철씨는 디지털 사전이 대세인 요즘에도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종이 사전을 고집한다. 그는 “종이 사전으로 단어를 찾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보물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고 답한다. 그는 “앞만 보고 걷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는 걸 ‘해찰한다’고 하는데 종이사전으로 단어를 찾는 것은 단어의 골목길을 ‘해찰’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어떤 단어를 찾고 싶을 때 인터넷 사전은 원하는 단어를 한 번에 찾게 해주지만 종이사전은 목표 단어를 찾아가는 길에 주변의 수많은 단어들을 보여준다는 것. 그는 또 사전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그는 “국어사전의 맨 마지막 단어가 뭘까 궁금해 찾아보니 ‘아니꼬워 비웃는 콧소리’란 뜻을 가진 ‘힝’이더라”며 “왜 하필 이 단어가 사전의 마지막에야 매달려있을까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아니꼬워하는 마음은 마지막으로 미뤄두고 참자는 의미 아니냐”며 웃음 지었다.

사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며 ‘정의’를 불법적으로 정의내리는 정철씨. 그는 “정의는 정의 내리는 사람 수 만큼 존재해야 한다”고 힘줘 말한다. 기존 사전의 정의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정의를 찾으려는 ‘건방진’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불법사전』을 읽는 이들에게 ‘부디 책을 더럽게 보라’고 부탁한다. 독자들이 합법적인 정의든 ‘정철의 정의’든 타인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책의 여백에 자신만의 뜻을 새롭게 써넣길 바라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